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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국은 미국과 한국을 깔보지 말라
작성자 dakshang

이미 언급하였거니와 젠 영감의 인기가 아직 사그라 들지 않아 영감의 글을 지속적으로 올릴것 같습니다. 이하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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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중국은 미국과 한국을 깔보지 말라
작성자: zenilvana 2017-03-21 08:32:4

중국사람에게는 평생 해 볼수 없는 일이 세가지 가 있다고 한다. 너무 많은 종류의 요리가 있어 다 먹어 보지 못하고, 그 숫자가 너무 많아 자기 글자인 한문을 다 배울수 없으며, 땅이 너무 넓어 다 다녀보지 못하는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방언(方言)이 너무많아 모국어를 다 배울수 없다는 항목이 추가되기도 한다. 중국은 모두 56개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그 땅의 넓이를 나타내는 말로는 ‘중국에는 없는것이 없다. 단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뿐이다. 그래서 발달한게 장사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상(華商)들이 그렇다. Zeng He(1371–1433 or 1435 鄭和)라는 명나라 때의 장군이 동남아를 거처 아프리카까지 왕래하면서 같이 갔던 군인들이 뒤에 남아서 오늘날의 Singapore 등지에서 화교로서 활략하게 된다.(참고 1)

중국에는 일찍이 중화사상(中華思想)이라는게 있었다. 여기에서 中은 가운데, 중심이라는 뜻이며 華는 문화를 의미했으며 자기들만이 천하의 중심이며 가장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선민의식 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타의 나라들은 오랑캐 정도로 생각하고 멸시했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중국이 깨진것은 그 유명한 ‘아편전쟁’ 때문이다. 중국무역상들은 銀으로만 거래를 원해서 그리 시작했었는데 西域(서역) 및 중앙아시아에서 자생(自生)하는 아편을 진통제 및 환각제로 귀히 여기는 것을 기화로 은대시 아편을 인도에서 재배하여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삼았다. 일반인들이 싼 아편을 대량으로 소모하게 된지라 중국인들 상당수가 아편중독으로 법죄 및 보건 상의 문제를 야기했던 바다.

1840년에서 42년까지 영국과 청나라가 격돌한 이 전쟁은, 아편수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위해 靑(청)의 선종은 아편무역 금지령을 내리는 한편, 임칙서란 사람을 광둥에 파견해서 영국상인들의 아편을 불태워 버리고 중국의 밀수업자들을 처형했다. 이에 영국은 무역의 보호를 구실로 해군을 파견, 전쟁이 발발했으며 청나라가 패하고 굴욕적인 ‘난징조약’이 체결됐다.

그 결과, 중국은 홍콩을 100년간 영국에 할양하는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고, 유럽의 열강들이 너도 나도 중국땅을 조차한 계기가 됐다. 예를 들어 독일은 산동반도 남쪽의 청도(靑島: 칭따오)를 1897년 청일전쟁을 도와주었다는 명분으로 조차받았고, 썅하이도 모두 4나라의 통치 분활되었다. 1997년 7월 1일 99년의 조차기간이 완료되어, 중국에 반환되었으며홍콩특별행정구의 지위를 가지게 됐다.

이후 중화사상에 젖어있던 중국은 점차 유럽과 일본등 자본주의 세계의 종속적 시장으로 재편되었으며 특히 굴욕적인 난징조약체결을 통해 중화사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근대화의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편전쟁은 중국에게 있어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기도 하다. 또 하나 이들이 얼마나 기계문명에서 낙후된 것을 절감하게 된 계기는 靑-日전쟁이 패배였다. 당시 조선땅에서는 연산군이 아들 고종을 밀처내고 섭정을 하면서 종획무진 나라를 좌지우지하다가 고종의 민비와 격돌하면서 종래의 종주국으로 행세하던 중국이 이홍장을 파견하여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이 때에 일본이 조선을 넘보던 시절이라서 이해관계에 얼킨 전쟁까지 번졌는데 이것 역시 일본에게 패함으로써 서태후란 암탉이 500여년의 중국을 망하게 했다. 그때가 1895년으로 대만을 전쟁보상이란 명목으로 일본에게 할애하고 말았다.

이어 국민당의 국민정부가 세워졌으나 모택동에 의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장개석은 1885년 대만으로 옮겨가서 정권을 유지했다. 중국의 오래된 ‘먹는문제를 ‘횐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자본주의로 해결한 지도자가 등소평 이다. 그래서 지금의 중국은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독재이고 경제는 철저히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됐다. 이 기묘한 구조가 언제 어떻게 발전할것인지는 중국자신도 모른다.

지난 2016년 6월 7일과 8일, 중국의 새 주석인 시진핑은 미국을 방문해서오바마와 7일과 8일 이틀동안 8시간의 회담을 했다. 시진핑은 7일의 1차회동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신형대국관계’를 오바마에게 설명하는데 할애했으며, 회담후 기자회견에서도 계속 이점을 강조했다. 시진핑 주석이 역설하고 있는
新型大國關係(신형대국관계)는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미국과 동등한 역할과 지위를 인정받지만 양측이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기 보다는 서로 잘 살고 협조하는 외교 노선을 뜻한다.

전임이었던 후진타오 주석시절 중국의 전략은 국제사회에서 강자의 하나로 군림하겠다는 의지를 떨치겠다는 것이였으며, 이는 결국 미국의 아시아지역에서의 종래의 입지를 약화 내지 견제하겠다는 뜻을 나타내는 뜻이 표면화 되는 반대효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중국은 과거 냉전시절 소련과 미국의 극한적인 대립이 소련의 붕괴로 끝난사실을 직시하여 미국과의 화해를 통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지배하는 대국이 되겠다는것이 그 의도다.

그러나 오바마는 회담중 이 단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중국의 평화로운 부상은 미국에도 도움이 된다.’ 고 강조했을 뿐이다. 그러나 미국이 누려온 최강대국의 위상에는 아직은 멀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건 사실이기도 하다.

미국은 본토, 알래스카, 하와이를 포함, 러시아와 캐나다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나라다. 중국이 큰 나라이긴 하지만 그 영토면적에서는 미국보다 조금작다. 현재 미국의 공군력은 여타나라의 공군력을 합한것보다 더 막강하다. 그 무서운 화력은 상대가 없을정도다. 11척의 항모를 운용, 5대양을 지배하는 해군력도 상대할 나라가 없다. 중국은 소련의 헌 배를 사다가 수리한 항모로 시운전 중이며, 다른 한척의 건조를 시작 했을뿐이다. 경제, 문화, 학문에서도 미국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 상당기간 세계의 선도국 자리를 유지할 것이다. 미국은 로마제국 이후에 있었던 어느 나라도 이처럼 막강한 세기적인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중국은 미국과 대등한 대국이 될수있을까? 지금 중국이 G2가 된것은 단지 경제력 때문이다. 30년여년 그들의 과잉의 인구로 인한 저임금의 세계적 공장이 되어 싸구려 물건들을 만들어 내면서 경제력이 신장됐던 사실을 무시 할 수 없지만, 단순히 경제의 규모로만 비교해서 중국인들이 ‘대국의 꿈’ 을 가는 것을 말릴 도리가 없겠다. 허나 2012년말 기준 중국의 1인당 GDP는 아직 5400달러수준이다 보니 전도가 요원한 희망임을 도저히 놓칠 수가 없다.

미국에도 도시와 시골이 있다. 그러나 지역적인 차이일뿐 의식주 생활수준은 똑같다. 중국에는 미국에 없는 오지(奧地) 다시 말해서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내부의 땅이 수없이 많다. 거기는 아직도 19세기를 살고있다. 그들은 양말이없어 신문지로 발을 감싸고 신발을 신었으며 먹고 사는 일에서는 거의 동물적 본능에 매달려 있다. 이러한 질적인 생활간격은 쉽게 해결되기 어려움을 그들은 안고있다.

예를 들어보자.

투르판(吐魯番)은 신강위구루자치구의 현(縣)으로서 유명한 천불동과 교하성, 고창고성이 있는 관광지로 중국의 국가급 풍경 명승지로서 연중내내 외국인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 투루판기차역의 화장실, 일을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서니 칸막이가 전혀 없다. 다큰 어른들이 내-외국인을 막론 엉치를 들어낸채 서로 쳐다보며 일을 보고있다. 로마시절에 하던 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마그레브란 후진국에도 이런 광경을 볼 수가 없을 정도다. 투루판은 오지가 아니라 세계적인 시골의 명승지다. 칸막이가 없는, 더럽고 냄새나는 그 원시적 화장실이 중국의 현주소다.

지방공항에는 그 흔한 전광판도 없다. 비행스케쥴은 흑판에 사람이 백묵으로 쓰고있었다. 연착과 연발은 국내선인데도 거의 3,4시간 정도이며 어나운스먼트도 없다. 모두가 죽은사람들 처럼 죽치고 앉아 기다리고 기다렸다. 내가 5-6년 전에 베이징에서 샹하이로 비행기에 올라 앉았는데 이처럼 장시간을 갖혀있어야 했다. 거기 승객의 어느 누구도 불평하거나 거북해 하던 사람을 보지 못했다. 연발한 배행기는 스케쥴에 없는, 알지도 못하는 공항에 내린다. 거기 손님이 있기 때문에 태우기 위해 착륙한다는 것이다. 이게 시골버스인지 현대판 비행기인지... 오지를 모르면 중국을 모르는 것이고 오지를 알면 중국이 대국이 될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번 THAAD 배치의 문제에서 그들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뜻에서 자국국민을 선동하여 한국물건을 배척하고 기물을 파괴하거나 한국으로의 여행을 금지하는 조처는 참으로 대국을 꿈꾸는 역대의 강대국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하고 있다. 어찌해서 이 사람들의 생각이 이처럼 옹졸해졌는지 도저히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이런 나라가 세계에서 어느 나라도 감히 미국을 깔보고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뻥을 튀기는 그들을 나는 참으로 불쌍하게 보고 마는...... 마치 북조선의 김정은 임금님이 세상을 알지 못하고 핵미사일을 날리며 세계의 11번째 경제강국과 첫번째 미국을 데리고 놀겠다는 발상과 그리 멀지가 않고 마는. 손자병법의 첫 마디는 "전쟁은 국부(國富)를 소진하는 행사"라고 정의하고 있다. 북조선이 지금 세계에서 꼴지의 경제력을 가졌는데 어찌 미국과 한국을 넘본다는 건가? 중국 역시 미화를 3 billion을 소장했어도 조만간 바닥이 날 겁니다. 두고 보시구레.

참고: Zheng He was the second son of a family from Kunyang, Yunnan and born into a Muslim family. He was a great-great-great-grandson of Sayyid Ajjal Shams al-Din Omar, a Persian who served in the administration of the Mongol Empire(元나라) and was the governor of Yunnan during the early Yuan dynasty.His great-grandfather was named Bayan and may have been stationed at a Mongol garrison in Yunnan. In the autumn of 1381, a Ming army invaded and conquered Yunnan, which was then ruled by the Mongol prince Basalawarmi, Prince of Liang. In 1381, Ma Hajji (Zheng He's father) died in the fighting between the Ming armies and Mongol forces.

Zheng He was captured by the Ming armies at Yunnan in 1381.[7] General Fu Youde saw Zheng He on a road and approached him in order to inquire about the location of the Mongol pretender.[19] Zheng He responded defiantly by saying that the Mongol pretender had jumped into a lake.[19] Afterwards, the general took him prisoner.[19] The young Zheng He was soon castrated before being placed in servitude of the Prince of Yan.[17] However, Levathes (1996) has stated that he was castrated in 1385.[19]

He was sent to serve in the household of Zhu Di, the Prince of Yan, who later became the Yongle Emperor.[He was 10 years old when he entered into the service of the Prince of Yan. Zhu Di was eleven years older than Zheng He.[21] Since 1380, the prince had been governing Beiping (the future Beijing), which was located near the northern frontier where the hostile Mongol tribes were situated. Zheng He would spend his early life as a soldier on the northern frontier. He often participated in Zhu Di's military campaigns against the Mongols. On 2 March 1390, Zheng He accompanied Zhu Di when he commanded his first expedition, which was a great victory as the Mongol commander Naghachu surrendered.

Zheng He's appearance as an adult was recorded: he was seven chi tall, had a waist that was five chi in circumference, cheeks and a forehead that were high, a small nose, glaring eyes, teeth that were white and well-shaped as shells, and a voice that was as loud as a bell. It is also recorded that he had great knowledge about warfare and was well-accustomed to battle.

The young eunuch eventually became a trusted adviser to the prince and assisted him when the Jianwen Emperor's hostility to his uncle's feudal bases prompted the 1399–1402 Jingnan Campaign which ended with the emperor's apparent death and the ascension of the Zhu Di, Prince of Yan, as the Yongle Emperor. In 1393, the Crown Prince had died, thus the deceased prince's son became the new heir apparent.

By the time the emperor died (24 June 1398), the Prince of Qin and the Prince of Jin had perished, which left Zhu Di, the Prince of Yan, as the eldest surviving son of the emperor. However, Zhu Di's nephew succeeded the imperial throne as the Jianwen Emperor.[28] In 1398, he issued a policy known as xiaofan, "reducing the feudatories", which entails eliminating all the princes by stripping their power and military forces.

In August 1399, Zhu Di openly rebelled against his nephew. In 1399, Zheng He successfully defended Beiping's city reservoir Zhenglunba against the imperial armies.In January 1402, Zhu Di began with his military campaign to capture the imperial capital Nanjing. Zheng He would be one of his commanders during this campaign.

禪涅槃

2019-02-02 10: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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