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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6회] 박정희, 눈에 핏발 선 채 쿠데타 모의
작성자 coyotebush

5ㆍ16쿠데타의 연원을 따지면 박정희의 끊임없는 쿠데타 집념의 소산이지만, 쿠데타가 현실적으로 모의된 것은 1960년 9월 10일 육사 8기 동기생 11명이 서울 중구 충무장이라는 음식점에서 쿠데타를 단행하기로 뜻을 모으고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하면서였다. ‘충무장 결의’는 당대의 재사로 알려진 김종필이 주도했다.

이들은 총무 김종필, 정보 김형욱, 인사 오치성, 작전 옥창호, 경제 김동환, 사법 길재호 등으로 업무분담까지 하였다. 이들은 숙의를 거쳐 박정희와 연계한다.

하극상사건으로 방첩대와 헌병대의 주목을 흐리게 한 가운데 1960년 11월 9일 신당동소재 박정희장군댁에서 충무장 결의를 한 정군파장교들이 모여 박정희장군을 중심으로 쿠데타계획을 수립하고 조직의 확장문제를 검토하였고, 1961년 1월 6일에도 박 장군댁에 재차 모여 쿠데타의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했는데, 11월 9일 모임부터 이석제 중령과 유승원 대령이 중앙 핵심멤버로 참여하였고, 오치성 중령은 정군파장교들이 포섭한 요원을 요직에 보직시켰다.

박정희는 든든한 추종세력이 생기자 본격적인 동지 포섭에 나섰다. 6개월 동안 포섭된 인물은 장경순 준장, 한웅진 준장ㆍ윤태일 준장ㆍ채명신 준장ㆍ최홍희 소장ㆍ김재춘 대령ㆍ이원엽 대령ㆍ문재준 대령ㆍ박치옥 대령 등이고, 8기생 중에는 박원빈ㆍ오학진ㆍ조항대ㆍ심이섭ㆍ엄병길ㆍ홍종철ㆍ장동운ㆍ최홍섭ㆍ서상린ㆍ임광섭ㆍ이지찬ㆍ안태갑ㆍ김용린ㆍ김성룡ㆍ박배근ㆍ김재후ㆍ강상욱 등이 포함되었다.

4ㆍ19혁명 후 집권한 장면 정부는 대군부정책으로 ① 국방장관을 당료출신으로 임명하여 문관우위를 확보하고 ② 10만 감군을 통해 경제성장을 꾀하며 ③ 유엔군이 전재하는 한 한국군 단독으로 쿠데타가 일어날 수 없다고 믿고 군부의 자율권을 존중키로 하였다.

장면 정부는 유엔군이 주둔하고 전시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부쿠데타는 불가능하다는, 안일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콜론보고서>도 무시하였다. 군부는 6ㆍ25전쟁 과정에서 엄청나게 비대해지고 장면 정부의 ‘10만 감군’ 정책으로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우스만의 증언이다.

1961년 3월 1일 실제 쿠데타가 있기 45일 전에 나는 한국군내의 쿠데타 기도가 있음을 상부에 보고했다.

매그루더 주한유엔군사령관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적어도 1차례 이상 “군내부의 쿠데타 기도를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장 총장은 매그루더 대장의 경고를 받고 “걱정 말라. 한국군에 관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걱정 안 해도 좋다”는 약간 반박적인 대답을 했다.

이 시기 대구에서 박정희를 만난 시인 구상은 “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대구에서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쿠데타 모의에 몰두했다. 대구 2군 참모장은 만주군 시절부터의 친구인 이주일(소장)이었고, 대구 옆의 영천에 있는 정보학교장은 육사 2기 동기인 한웅진(준장)이었다.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에 가담한 이주일과 한웅진은 포섭 대상자들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과정에서 박정희가 장교들의 특성과 자질을 줄줄 꿰고 있는 것에 놀랐다.

박정희의 최대 자산은 인간학(人間學), 그것도 마키아벨리적인 인간학에 정통해 있다는 것이었다. 정 많고 여린 사람들의 특성을 포착해 그걸 최대한 활용한 뒤에 내칠 수 있는 능력과 심성은 범인(凡人)으로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박정희만의 것이었다.

이승만의 폭정으로 짓밟히고 형해만 남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4ㆍ19 시민ㆍ학생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소생하여 다시 활력을 되찾고 있을 때, 박정희와 김종필을 우두머리로 하는 군부쿠데타 모의가 점차 가시화되어 가고 있었다.

2019-02-26 11: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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