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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7회] 5ㆍ16반란, 고려 정중부 이래 1천년만의 무인시대
작성자 coyotebush

한국의 오랜 문민지배전통은 무인이 창업을 하고도 곧 문민위주의 정치로 회귀하였다.

고려 왕건이 그렇고 조선 이성계도 마찬가지다. 한말 국권을 상실하고 중국에 수립된 임시정부도 문민위주의 정치가 중심이 되었다.

예외라면 1170년 고려 의종대에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 등이 이른바 ‘무신란’을 일으켜 집권한 데 뒤이어 최충헌 일당이 권력을 오로지 한 1세기 정도가 무인지배시대다.

국토방위의 임무를 위해 무장한 군인이 총부리를 정부와 국민을 향해 돌리는 것은 반란이다. 예나 지금이나 반란행위는 가장 혹독하게 처벌한다.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왕조시대에는 3족이 멸살되었다.

동양의 ‘반란’이 영어권에서는 쿠데타로 통칭된다. 뜻은 다르지 않다. 쿠데타의 사전적 의미는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력 등의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권을 빼앗는 정변”이다.

박근혜 정권에서 행정부 장관 내정자들이 국회청문회에서 5ㆍ16을 정의해보라는 야당의원들의 질의에 대해 하나같이 쿠데타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연구가 안 되었다”는 등 어물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5ㆍ16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의 딸이 임명한 국무위원들의 태도가 그랬다. 쿠데타가 자랑스러운 행위였다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장광설을 퍼뜨렸을 것이다. 1961년 5월 16일 미명, 정중부가 무신란을 일으킨지 정확히 891년 만에 박정희가 주동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3권을 장악하고 민주헌정질서를 유린하였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가장 큰 사건의 하나인 5ㆍ16군사쿠데타는 4월 민주혁명으로 민주당정권이 들어선 지 8개월 만에 발생했다.

5ㆍ16은 군정 3년과 제3, 4공화국에 이어 그 아류들에 의한 제5, 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장장 31년에 걸친 군사통치의 서막이 되었다.

박정희 소장과 그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이 중심이 된 반란군은 이날 새벽 3시경 한강 어귀에 진입하여 약간의 총격전 끝에 예정보다 약 1시간 늦게 서울입성에 성공했다. 이들 반란군은 중앙청 및 서울중앙방송국 등 목표지점을 일제히 점거하고, 새벽 5시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는 한편 6개항의 ‘혁명공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이어 오전 9시에는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 각료의 체포령에 이어 오후 7시를 기해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쿠데타는 일단 성공했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금조(今朝)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ㆍ입법ㆍ사법의 3권을 완전이 장악하고….”라고 시작되는 이른바 ‘궐기취지문’은 김종필의 작품이었다. 이른바 6개항의 ‘혁명공약’도 그가 썼다. 쿠데타를 일으키고 반란군은 자신들의 행위를 ‘혁명’이라고 내세웠다. 박정희 집권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쿠데타 잔재들은 혁명이라고 우기고 표기한다. 5ㆍ16 이후 4ㆍ19혁명은 ‘의거’로 격하되고, 그 자리에 5ㆍ16이 혁명의 자리를 차지했다.

쿠데타세력은 즉각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반공국시’를 비롯한 6개항이다. 뒷날 박정희의 민정참여를 둘러싸고 6항의 “이와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조항은 폐기시켰다. 김종필의 증언.

‘반공 국시’와 관련 “궐기문을 인쇄하러 가기 전 박 소장이 이 반공 국시 조항을 읽으면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혼잣말 비슷하게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 이라고 말했다. 거사를 앞둔 박 소장의 마음이 매듭처럼 뭉쳐져 있던 대목이었다.”

쿠데타는 1차적인 군통수권자 장면 총리가 수녀원으로 피신하고 윤보선 대통령이 진압명령을 내리지 않은 채 애매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진압병력이 움직이지 않았다. 쿠데타는 5월 18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육사생들이 쿠데타 지지를 선언하는 시가행진을 하고 장면 내각이 총사퇴를 함으로써 기정사실화되었다.

박정희의 쿠데타와 관련, 지탄받아야 할 인물들이 있다.

4월혁명 후 구파와 치열한 접전 끝에 집권한 장면은 군일부의 쿠데타 음모설이 수차례 보고되었음에도 이를 방치하다가 막상 일이 터지자 수녀원으로 피신하는 무능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였다.

신파와 집권경쟁 끝에 명목상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윤보선은 사사건건 장면 정권을 견제하면서 쿠데타측의 방문을 받고 “올 것이 왔다”는 발언 등, 쿠데타 사전 통보 및 내통설이 제기될 만큼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또한 육사생들을 이끌고 쿠데타 지지에 나선 전두환은 19년 후 직접 12ㆍ12 쿠데타를 일으켰다.

2019-03-04 13: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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