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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1회] 북한, 5ㆍ16 긍정평가 했다가 ‘미국사주’
작성자 coyotebush

남한의 5ㆍ16쿠데타 소식을 들은 북한은 어땠을까.

5ㆍ16 당일 차오샤오광(喬曉光) 북한주재 중국대사가 북한의 김일 부수상에게서 전해들은 쿠데타 정보를 마오쩌둥(毛澤東) 주석 등에게 보고된 <외교전문>에 따르면 북한측의 인식이 확연히 드러난다. 뒷날 이 문건을 입수한 한 언론의 보도이다.

▽ 군사쿠데타 가능성 예견 = 북한은 장면 정권의 전복은 군부 내 ‘애국세력’이 등장하고 민중봉기의 역량이 강화되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또 군부 내 애국세력은 그 지도력이 상당히 강하며 이른바 ‘장면 도당’의 억압에 의한 대중봉기 진압작전에 투입된다면 일부 군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자발적 반란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미군이 한국군을 통제하는 상황에서도 군부가 독자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을 내다본 셈.

▽ 진보냐 반동이냐? = 그러나 막상 쿠데타가 발생하자 북한은 군사쿠데타 세력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다소 애를 먹은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은 쿠데타 발생 직후 미국이 그들의 ‘파시스트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쿠데타를 사주한 것으로 추측했지만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마셜 그린 당시 주한 미국대리대사가 장면 정권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것을 본 뒤 미국의 사주가 아닌 독자적인 쿠데타 쪽으로 무게를 실었다.

1961년 5월 16일자 전문은 이번 쿠데타가 육군본부의 명령이 아닌 박정희 소장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이며, 그는 군부 소장파로부터 신망을 받고 조직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전문은 박정희 소장이 한때 남로당원이었다고도 적고 있다. 결국 북한은 박정희 소장이 군부 내 파벌갈등 차원에서 현 상황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이 시점에 북한은 “미국의 사주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틀 뒤인 18일 “미국에 의해 기획된 것”이라며 쿠데타 세력을 반동으로 규정했다.

쿠데타가 성공하는 듯 하자 반란군은 최고권력기구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의장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 부의장은 쿠데타의 실질적 주도자인 박정희를 선임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남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포고령 제1호를 통해 옥내외 집회금지, 국외여행 불허, 언론 사전검열, 야간통행금지 시간 연장 등을 발표했다. 반란군은 5월 18일 군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하여 최고권력기구로서 법적 뒷받침을 받게 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입법권ㆍ행정권의 일부와 사법의 통제권을 장악, 법제ㆍ사법ㆍ내무ㆍ외무ㆍ국방ㆍ재정ㆍ경제ㆍ교통ㆍ체신ㆍ문교ㆍ사회ㆍ운영ㆍ기획의 7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직속기관으로 중앙정보부ㆍ재건국민운동본부ㆍ수도방위사령부ㆍ감사원을 두어 본격적인 군정을 실시했다. 또한 산하기구인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통해 용공분자의 색출을 표방하며 혁신세력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는 한편, 각급 정당과 사회단체ㆍ일부 언론매체ㆍ노동조합을 강제해산시키는 등 민주세력에 대한 폭압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반란군은 5월 20일 장도영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을 구성하고, 이주일 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최영규 준장을 소장으로 하는 혁명재판소와 박창암 대령을 부장으로 하는 혁명검찰부를 설치해 자유당ㆍ민주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5ㆍ16쿠데타 전후의 이른바 반혁명사건을 처리케 했다.

군정은 3ㆍ15부정선거와 관련 최인규, 발포책임자 곽영주, 정치깡패 이정재 등을 처형하고,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반국가죄로 처형한 반면 국민의 지탄을 받아온 독점재벌 등 부정축재자들에 대해서는 경제건설에 적극 활용한다는 명분으로 거의 사면했다.

정권의 장악이 확실해지면서 쿠데타 세력 간에 권력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5ㆍ16쿠데타를 방관했던 장도영을 몰아내고 실권자인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박정희 세력은 7월 3일 장도영과 쿠데타의 핵심이였던 육사 5기 출신의 박치옥ㆍ문재준 등을 반혁명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그리고 김종필 계열의 육사 8기들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게 되었다.

군정기간 동안 적발된 이른바 반혁명 사건이 13건에 달했고, 최고회의에 흡수되었던 최고위원 장성들의 상당수가 관련혐의로 제거되어 63년 2월 최고회의에는 발족 당시 32명 위원 가운데 6명만 남을 정도로 치열한 숙청이 자행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정치정화법을 제정하여 민간정치인들을 일부는 거세하고 일부는 포섭하는 등 분열책을 펴면서 자금원을 확보하기 위해 화폐개혁 등의 경제조치를 단행했다.

5ㆍ16쿠데타는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좋지 못한 선례를 한국현대사에 남기게 되었으며, 그 선례는 이후 정치군인들에게 권력에 야심을 갖게 하는 충동을 뿌리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2019-03-10 13:03:21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1   coyotebush [ 2019-03-10 13:04:21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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