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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2회] 쿠데타세력 민간인 대량학살 음모
작성자 coyotebush

쿠데타세력은 이에 앞서 민주당 정부 각료와 정치인ㆍ혁신계ㆍ학생ㆍ교수 등 7만 6천여 명을 체포했다. 최고회의는 “반국가적 반민족적 또는 반혁명적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고자 1961년 6월 21일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 조직법’을 제정한 데 이어 다음날에는 소급법인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공포했다.

7월 말부터 진행된 이른바 ‘혁명재판’은 3ㆍ15부정선거 관련자나 부정축재 관련자들과 함께, 4월혁명 이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처벌하였다.

주요 사건별로는, 통일사회당ㆍ사회대중당ㆍ혁신당ㆍ사회당 등 혁신정당 관련 사건이 15건, 민통전학련(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등 청년ㆍ학생 단체 관련 사건이 1건, 통민청(통일민주청년연맹) 사건이 1건, 민민청(민주민족청년동맹) 사건이 8건, 민자통(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등 정당 주도 통일단체 사건이 8건, 피학살자유족회 등 사회단체사건 2건, 기타 민족일보사건, 교원노조사건 11건 등 총 48건에 달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부는 물리력을 동원하여 전광석화식으로 민족ㆍ민주세력을 제압했다. 사건의 주요 일람이다.

5월 17일 - 장면 정부 전 국무위원 자진출두 명령.
5월 18일 - 쿠데타세력, 혁신계 3,300여 명과 조용수 등 민족일보 관계자 전격체포.
5월 19일 - 민족일보 폐간.
5월 22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정당ㆍ사회단체ㆍ노조해체 포고령, 치안국 용공혐의자 2,000여명과 깡패 4,200여명 검거발표.
5월 23일 - 최고회의, 언론정화 포고발표, 정기간행물 1,200여종 폐간.
7월 4일 - 반공법 공포
8월 25일 - 혁명재판소, 반공청년단 종로구단장 임화수 사형, 반공청년 단장 신도환 무기, 유자광 징역 12년 선고.
8월 28일 - 혁명재판소, 민족일보사건 1심공판.
9월 14일 - 혁명재판소, 사회당사건 관련자 최백근에 사형선고.
9월 30일 - 혁명재판소, 경무대 앞 발포사건 관련 홍진기ㆍ곽영주에 사형선고, 유충렬 무기, 민통학련사건 피고 전원에 유죄판결.
10월 31일 - 혁명재판소 민족일보사건 조용수ㆍ안신규ㆍ송지영에 사형선고.
11월 8일 - 혁명재판소, 사회당사건 상고심 기각 최백근에 사형선고.
12월 20일 -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송지영과 안신규 무기로 감형.
12월 21일 - 최인규ㆍ곽영주ㆍ조용수ㆍ임화수ㆍ최백근 사형집행.

1961년 5월부터 이해 연말까지 한국사회는 거친 피바람이 불었다. 집권한 군부는 주로 진보적 민족주의 인사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미국이 박정희의 전력을 의심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군부권력은 부정선거 원흉, 자유당 간부들의 처단이나 부정축재자 처벌보다 진보적 민족주의세력을 훨씬 더 심하게 단죄했다. 최고회의는 통일운동, 피학살자유족회 활동 등을 특수반국가행위로 규정하고, 6월 22일 소급법으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공포했다.

혁명검찰부에 의하면 혁신정당과 민자통, 교원노조, 민통련, 유족회 활동자가 주대상인 특수반국가행위 사건은 225건 608명으로 혁명검찰부에 수리된 사건 전체 인원의 41.3%나 차지한 반면, 3ㆍ15부정선거 원흉들은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더라도 최인규 내무장관이 사형당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다 2~3년 내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혁신계와 청년ㆍ학생들은 다수가 장기복역했고,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사회당 간부로 남북협상을 주장했던 최백근이 처형되었다. 희생양이었다.

쿠데타 초기 주체들 사이에서 이른바 ‘용공분자’라 하여 검거한 인물들을 재판절차 없이 대량 살육할 가공한 음모가 있었다는, 쿠데타 실세의 한 사람이던 유원식 준장의 증언이다.

5ㆍ16 직후 한ㆍ미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군사정권과 미국정부가 평행선을 달리며 긴장이 고조되어 있을 때 박정희 소장은 그의 사상이 의심받고 있음을 알고 그의 측근자들과 함께 자신들이 좌익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마침내 가공할 만한 사건을 야기할 뻔하였다. 소위 용공분자 일제 검거가 그것이다.

육군본부에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별관인 전 국회의사당으로 이사한 이튿날 아침에 출근해서 박정희 부의장실에 들어갔을 때 마침 김종필이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박 부의장에게, “어젯밤에 모두 잡아 넣었습니다. 약 2만 8천 명 가량 되는데, 수송에 필요한 열차도 준비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들을 거제도로 데려가서 한데 모아 놓고 기관총으로 한꺼번에 사살해 버리는 것뿐입니다.”

나는 옆에서 이 말을 듣고 무슨 내용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알아보니 김종필이 그 때 당시의 정보과장으로 치안본부에 가 있던 방(方) 모 대령에게 극비리에 지시하여 전국의 요시찰인 명부에 실려 있는 사람을 일제히 검거했다는 것인데, 김종필의 아침 보고는 그 검거가 모두 끝나고 사후 대책까지 마련되었다는 일종의 결과보고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기에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몇 번씩 물어 본 끝에 비로소 그 전상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한꺼번에 학살하겠다는 계획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비정상적인 정신병자라도 생각하기 어려운 만행이었다. 유태인을 집단 학살한 나치의 만행에 비견할 야수와도 같은 광란이다.

다행히 일부 인사들의 반대로 ‘집단학살극’은 취소되었다.

2019-03-14 08: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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