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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3회] 인권탄압의 원부, 중앙정보부 창설
작성자 coyotebush

5ㆍ16반란자들은 거사의 명분으로 장면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들었다. 그리고 대미(對美)용으로 반공을 내세웠다.

집권한지 8개월 밖에 안되는 장면 정부는 미쳐 부패할 겨를이 없었다. 실제로 군검찰의 조사 결과도 부패 혐의를 적발하지 못했다. 1961년 ‘4월 위기설’도 별탈없이 넘기고 정국은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신구파가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분당하여 정파싸움이 치열했지만, 이웃집이 싸운다고 하여 도둑이 들어갈 명분은 아니다. 장면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세워 추진하고 있을 때 쿠데타를 맞게 되었다.

박정희는 쿠데타가 성공하자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자 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로 ‘중앙정보부법’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제정ㆍ공포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다. 중정은 이후 18년 동안 인권탄압과 정보정치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박정희의 수족이 되고, 결국 그 수장의 총격으로 암살되기에 이르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발족된 중정은 “국가안정보장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 부서의 정보ㆍ수사활동을 감독”하며, “국가의 타기관 소속 직원을 지휘ㆍ감독”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중정은 군내부의 반혁명 기도나 민간정치인들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분쇄ㆍ저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되었다. 쿠데타의 제2인자 김종필이 군부 내 기반이었던 특수부대요원 3천여 명을 중심으로 중정을 조직하면서 대통령(당시는 최고회의 의장) 직속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중정은 각종 정보ㆍ수사기관뿐만 아니라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기관의 활동을 지휘ㆍ감독할 수 있는, 명실 공히 최고 권력기관으로 현역 군인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군사정권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정부기관ㆍ군부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해 감시와 통제활동을 벌여서 국민에 대한 군사통치를 구체화시켰다.

중앙정보부는 쿠데타 직후에 발생한, 이른바 장도영 장군의 반혁명사건을 비롯하여 권력내부 반대세력의 제거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막강한 권부의 실세로 등장했다.

1964년에는 중정의 요원 수가 37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거번 맥코맥의 <한국과 일본:관계정상화 10년>이란 책에는 남한인구의 약 10% 정도가 중앙정보부와 직간접으로 맺고 활동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실려 있다.

이같이 방대한 수에 달하는 중앙정보부 요원들 중 상당수는 민간인들로 채워졌는데, 이들은 정보요원으로서 자기 신분을 숨긴 채 통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면서 주변 동태를 감시하고 그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이들은 암암리에 정부의 시책을 홍보하고 그럼으로써 주위의 여론을 정부에게 유리하도록 조성하는 듯 다방면에서 권력의 말초신경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요소요소에 요원을 심어놓음으로써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한편, 보다 상급의 전문적인 요원들은(이들 중에는 민간인 복장을 한 현역군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학원, 신문사 편집국, 각종 문화단체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비정부 기관에 공개적으로 드나들며 정부의 방침에 따르도록 회유하거나 협박했다.

중앙정보부 요원의 개입활동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사실상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관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하다못해 다방과 술집에까지도 이들의 손길이 미칠 정도였다.

중앙정보부는 공화당 사전조직, 4대 의혹사건을 비롯하여 정치활동규제법 제정 등에 이르기까지 개입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인혁당사건을 비롯한 숱한 용공조작 사건을 만들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중앙정보부는 초법적인 위치에서 엄청난 예산과 인력을 동원하여 독재정권의 전위역할을 수행했다.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1961년 7월 3일에 제정ㆍ공포된 이른바 반공법이다. 이 법은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국민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반공법은 야당ㆍ학생ㆍ언론인, 종교인ㆍ문화인, 노동자 등 모든 비판세력의 활동을 규제할 수 있는 조항을 담고 있었다. 가히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드물 만큼 지독한 악법인 반공법은 흔히 말하는 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행위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남북협상에 의한 평화적 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한 서신교환 등 낮은 차원의 남북교류조차도 반국가단체인 북한과 회합ㆍ통신하는 것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반공법의 저촉대상이 되었다. 이를 근거로 5ㆍ16쿠데타 이전에 남북학생회담 추진 등 평화적 민족통일을 위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체포ㆍ구속된 인사들 모두에게 반공법이 소급 적용되었다.

이중에는 오직 “남북한의 경제ㆍ문화적 교류를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폐간조치당했던 <민족일보>의 사장 조용수도 포함되었다. 또한 단순히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것조차도 반국가단체의 주장에 동조했거나 적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2019-03-15 14:25:26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1   coyotebush [ 2019-03-15 14:28:03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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