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Los Angeles
열린 마당
제목 [49회] “나 같은 불운한 군인 없기를 “
작성자 coyotebush

귀국한 박정희는 케네디가 요청한 ‘민정이양’의 방법론을 찾았다.

그것은 군복을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선거를 통해 재집권하는 길이었다. 4대의혹사건 등을 통해 마련한 정치자금과 그동안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사전조직한 정당을 가동하면 선거라는 형식을 빌어 얼마든지 재집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박정희는 1962년 3월 16일 구정치인 및 군내 반대파의 손발을 묶기 위해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하여 4.374명의 정치활동을 봉쇄시켰다.

이 명단에 오른 사람은 최고회의에서 추방된 전 군지도자와 군사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을 비롯해 자유당ㆍ민주당ㆍ신민당 및 진보적 군소정당의 저명한 지도자, 남북회담 관련 학생지도자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에게는 6년간 공직선거에 후보로 출마하거나 선거운동 종사, 정치집회 연사, 정당활동이 금지되었다.

박정희는 5ㆍ16 직후 군사정부가 국민복지를 이룩하고 국민의 도의ㆍ재건의식을 높인다는 이름 아래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기관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하고 전국 시도군읍면에 지부를 두었다. 본부장에 고려대학 총장 유진오를 임명하고 주요 민간단체 임원, 저명언론인, 출판인, 교육자ㆍ연예인ㆍ종교인들을 이 운동의 지도적 위치에 앉게 하였다. 쿠데타 세력의 세 확장을 위한 외곽단체의 역할이 숨은 목적이었다.

민정이양으로 목표를 정한 박정희는 군복을 벗기로 했다. 주체세력 내부에 반발이 적지 않았다. 당초의 약속대로 정치에 참여할 것이 아니라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원대 복귀는 혁명주체들 사이에서도 대세였다. 박창암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혁명 동지들은 대국민 약속을 지켜 원대 복귀를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며 “당시 최고위원 32명 가운데 원대 복귀를 반대한 사람은 4명뿐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문화일보>, 1996년 5월 16일)

그러나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박정희 친위조직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필은 “등기문서는 처음부터 내 이름으로 해야지 제3자 이름으로 했다가 나중에 다시 내 이름으로 하기는 어렵다”며 박정희에게 집권을 권유했다고 한다.

초대 공화당 조직부장을 지낸 강성원 씨(76세, 성원유업 회장)는 박정희 일행이 혁명공약을 깨고 민정에 참여한 배경을 두고 “군정 기간 중 집권타성에 젖어 이미 권력의 단맛을 본 데다 박정희 주변에 직업정치인 등 집권구축 세력이 강하게 형성된 탓”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몇 차례 번의와 제의를 거듭하면서 정치적 곡예를 벌였으나 본심은 권력의 유지였다. 민주공화당 사전조직 등이 이를 입증한다.

쿠데타 주역의 한 사람으로 중앙정보부 6국장 등을 지낸 백태하의 증언이다.

“그가 정권을 장악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혁명과업을 완수하는데 앞으로 20년이 걸린다’는 말을 나는 박정희로부터 직접 들은 바가 있었다. 이는 결코 나에게만 한 말은 아닐 것이며 그의 장기집권 구상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박정희는 그동안 자기 손으로 별을 둘 씩이나 달고 육군 대장이 되었다. 구미에서 교편생활을 던지고 만군에 들어갈 때 “대장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러나 더 큰 야망을 위해 자기 손으로 대장 계급장을 떼야 했다.

1963년 8월30일 7사단 연병장에서 열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대장의 전역식. 박 의장은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고 연설했다.

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강원도 철원군 제5군단 관내 지포리에서 전역식을 가졌다. 만군 → 일본군 → 한국군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군인의 역정이었다. 그는 전역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병영을 물러가는 이 군인을 키워 주신 선배, 전우 여러분. 그리고 군사혁명의 2년 동안 ‘혁명하(革命下)’라는 불편 속에서도 참고 편달 협조해 주신 국민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리며 다음의 한 구절로서 전역의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불운한 군인’이란 말은 금방 세상의 화제가 되었다.

더러는 선망에서, 더러는 비아냥에서 회자되었다. 그리고 16년 후 그가 암살당하면서 5ㆍ16쿠데타를 지지했던 육사생 전두환 일당이 12ㆍ12하극상을 일으켜 ‘불운한 군인 2’가 되어 1980년 5ㆍ17쿠데타를 주동했다.

전역사를 마친 박정희는 축하 케이크를 자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감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날 박정희는 서울역 앞에 자리잡은 공화당사를 방문해 입당 수속을 밟았다. 모두 예정된 코스였다.

2019-04-04 09:02:53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전자신문
주간운세
시민권 취득 예상문제
운전면허 예상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