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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근혜 ♡ 최태민
작성자 hermes

박근혜는 1952년 2월2일 경북 대구시 삼덕동에서 육군정보학교 교장이던 대령 박정희와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희는 이혼한 부인과 사이에 딸이 있었으므로 박근혜가 실제로는 차녀인 셈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그 무렵, 박정희는 ‘여수·순천 반란사건’의 회오리바람에서 벗어나 순탄하게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근혜는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해서 장충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뒤 천주교 계열 학교인 성심여중·고를 나와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974년은 대통령 박정희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면서 재야 민주세력과 팽팽하게 맞서던 때라서 박근혜도 긴장한 상태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가 유학을 간 곳은 알프스 산맥 언저리에 있는 그르노블이라는 도시였다. 그는 본격적인 학문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어학과정에서 프랑스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는 프랑스로 간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인생의 가장 힘들고 거센 폭풍’을 만나야 했다.

“친구들과 여행중이던 어느 날, 하숙집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겼다며 빨리 하숙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하숙집에 도착하니 대사관에서 나온 분들이 와 계셨다. 모두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

짐도 챙기지 못한 채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 수속을 하기 위해 바삐 걸어가다가 궁금한 마음에 신문 스탠드로 갔다. 한 신문에 실린 아버지 어머니 사진 위에 ‘암살’이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급히 신문을 펼쳐보았다. 1면에 어머니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온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 오듯 눈물만 쏟아졌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렇게 쉬지 않고 울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박근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83~84쪽)

박근혜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쳤다’고 한다. 그는 겨우 22세의 나이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장례식을 치른 지 엿새 뒤 가슴에 상장을 단 채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참석함으로써 공식행사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섰다. 박근혜는 그 이후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은 데 이어 ‘새마음운동’을 펼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했다.

“나는 전국 각지의 학교를 돌며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에 적극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때마다 청소년들이 내게 보내는 반응은 열렬했다. 지방 어디를 가나 환한 미소와 박수로 나를 맞아주었다. 아마도 ‘어린 퍼스트레이디’라는 점에서 내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같다.

나는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고아원, 육군병원, 모자원, 양로원 등을 다니면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살피고, 재해가 발생하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서둘러 달려갔다. 아버지가 굵직한 정책 결정으로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을 때, 나는 아버지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정부의 손길이 닿도록 힘썼다.”(위의 책, 111쪽)

박근혜가 자서전에 쓴 이야기를 보면, 어머니 육영수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받은 충격과 정신적 상처를 딛고 일어나서 22세의 앳된 나이로 퍼스트레이디의 직무를 열심히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에는 자신과 아버지 박정희의 긍정적인 면모가 주로 부각되어 있을 뿐, 부녀가 공식적 업무나 사생활에서 드러낸 어두운 면들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1974년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가 된 이후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추궁’한 세력은 얄궂게도 그가 속한 한나라당 사람들이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그 당 안에서 벌어진 경선에서 이명박 진영의 핵심인물들이나 그에게 호의적인 언론매체들이 박근혜를 둘러싼 의혹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것이다. 2007년 7월 19일 서울 효창동의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대선 예비후보 검증청문회’에서 가장 눈길을 끈 질문과 답변은 목사 최태민에 관한 것이었다. 아래는 패널이 질문하고 박근혜가 대답한 내용 가운데 주요한 대목들이다.

·최태민 목사를 어떻게 만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로 기억한다. 그때 내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바쁘게 보낼 때인데 위로, 격려 편지와 전화를 주신 분 중 마음에 와 닿아 만난 분 중 하나이다.

·최 목사는 이름이 7개, 결혼도 6번 했다고 한다. 최 목사의 경력을 당시에 알았는가?

-목사로 알았고, 당시에 그런 내용은 몰랐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사람의 일생까지 검토해서 만나지 않는다.

·최 목사는 박 후보의 이름을 팔아 비리를 저지르고 청와대를 무상출입해 당시 중앙정보부가 조사를 했었다.

-최 목사는 경호실, 비서실이 있고 출입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청와대 무상출입이 가능하지 않다.

·정보부 조사에 의하면 최 목사는 공사 수주, 장군 승진, 국회의원 공천 명목으로 돈을 받는 등 비리 건수가 40여 건이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저와 중정부장, 최 목사, 관계되는 사람들을 불러 직접 조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횡령하고 사기를 쳤는지 답하라고 했는데 확실한 답이 없었고, (비리) 내용이 막연했다. 실체가 없는 얘기로 끝나서 아버지가 대검에서 조사해보라고 지시했다. 아버지는 친척도 엄격하게 관리했다.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용서가 없었을 것이다. 근데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간추려서 말하면, 박근혜는 최태민이 저질렀다고 정보기관이 파악한 비리와 부정을 전혀 몰랐으며, 아버지 박정희가 직접 최태민을 ‘심문’했지만 그런 사실이 없거나 막연한 추측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2019-04-05 07: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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