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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근혜 ♥ 최태민
작성자 hermes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둘러싸고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벌어진 논란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012년 3월말 현재 한나라당 후신인 새누리당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는 박근혜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그에 대한 지지율은 새누리당 안 경쟁자들의 지지율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훨씬 높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예상밖의 사건들이 벌어지지 않는 한, 12월19일의 제18대 대통령선거에 박근혜가 새누리당 후보로 나서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야권의 정치세력은 물론이고 새누리당 안에서 대선 후보 경쟁을 끝까지 계속할 정치인들이 박근혜의 실체 파헤치기를 끈질기게 시도할 가능성은 아주 높다.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도 ‘최태민 스캔들’이 도마에 오르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스캔들의 뿌리는 무엇이며 지금까지 드러난 증언과 자료는 무엇인지를 자세히 보기로 하자.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증언’한 사람은 박정희를 살해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그는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수괴미수죄’로 재판을 받던 때 ‘항소이유서’와 ‘항소이유보충서’를 군법회의에 제출했는데, 거기에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구체적 사실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2007년 6월 1일자 동아닷컴에 실린 기사(신동아 기자 허만섭이 쓴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는 김재규의 항소이유서(변호인이 작성)에 나오는 최태민 관련 부분을 아래와 같이 전했다.

“피고인(김재규)은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이 있는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 하면서 반문하길래 피고인으로서는 처음에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놀랐으며, 대통령은 큰딸인 박근혜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근혜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여 대통령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조사 후에 최태민이라는 자를 총재직에서 물러나게는 했으나 그 후 알고보니 근혜가 총재가 되고 그 배후에서 여전히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 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히 하게 해야 합니다’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일도 있어서,대통령 주위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변호인은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최태민에 관한 김재규의 진술을 이렇게 요약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정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親鞫)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습니다.”

김재규의 증언에는 최태민의 인적사항이나 구체적 부정행위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신동아가 2007년 늦은 봄에 입수한 중앙정보부의 수사보고서(‘최태민 관련 자료’)에는 최태민의 출생, 성장배경, 경력, 박근혜를 만나게 된 과정, 구국여성봉사단 창설 이후의 부정행위 의혹, 여성 추문 등이 A4용지 16장 분량으로 들어 있었다. 그 수사보고서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최태민은 1912년 5월 5일생(1979년 당시 67세)으로 이름을 7개(최상훈, 최퇴운, 공해남, 최태민 등)나 사용했다.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인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황해도경 순사’로 재직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월남해서 최상훈이라는 이름으로 강원도경 소속 경찰관이 된 그는 1947년 4월 인천경찰서 경위(사찰주임)가 됐다가 1950년에는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1954년 초에는 부인과의 불화 때문에 경남 동래군의 금화사라는 절로 도피해서 최퇴운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됐다. 1963년 5월에는 불교계 인맥을 통해 집권당인 공화당 중앙위원으로 뽑혔다. 1965년 1월 천일창고(주)를 운영하던 최태민은 같은 해 2월 15일 ‘유가증권 위조’ 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돼 4년쯤 도피생활을 했다. 1969년에 천주교, 불교, 기독교를 결합한 종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1974년 5월 ‘태자마마’라고 자칭했다.

최태민이 박근혜를 처음으로 만난 때는 1975년 3월 6일이라고 한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복합하여 창업한 영세계의 교리인 ‘영혼합일법’을 주장하던 최태민은 1975년 2월 말경 박근혜에게 세 번에 걸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서 근혜를 도와주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박근혜를 처음 만나게 된 그는 당시 종교계의 난맥상을 개탄하면서 ‘구국선교’를 역설했다. 최태민은 4월 29일 박근혜의 후원을 받아 자신의 심복 중심으로 ‘대한국국선교회(1976년 12월 10일 구국봉사단으로, 1979년 5월 1일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를 설립하고 총재로 취임했다. 박근혜는 명예총재가 되었다.

중앙정보부의 수사보고서에 따르면 최태민은 기업인들을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으로 위촉해 1인당 2000만~5000만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 원의 운영비를 받았다고 한다. 그 단체는 행정기관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으로 동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해서 3백만여 명의 단원을 확보했다.

2019-04-05 08: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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