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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2회] 두 달 만에 마련한 제1차 5개년계획안
작성자 coyotebush

대선에서 윤보선을 15만표 차이로 이긴 박정희는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1월 26일 치른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야당의 분열로 공화당이 압승함으로써 그는 탄탄한 기반 위에서 새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로써 한국은 군사정권의 긴 ‘병영사회’에서 똑같은 리더의 ‘경영사회’로 전환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민선의 과정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지만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아시아ㆍ아프리카 저개발국가들의 쿠데타 →민선의 과정을 답습한 것이다. 하여 항상 정통성의 불안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은 경제발전을 통한 국민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극심한 가난을 겪은 터여서 경제발전에 대한 집념이 남달랐다. 경제발전으로 정통성의 위기를 정당화하려는 뜻이 강했다. 결과론적으로 ‘경제발전 = 박정희’라는 등식을 만들었고, 지금도 ‘박정희 신화’의 주제어가 되고 있다.

제2차대전 이후 세계 각국은 경제발전이 공통적인 과제였다. 한국에서도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었다. 장면 민주당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내걸고 추진하였다.

장면 정부가 제시한 경제정책의 골자는 “첫째, 국민정신의 혁명을 위한 국토건설사업의 시행, 둘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이었다.” 이 중에 국토건설사업은 국민 대다수와 직접 관련된 사업으로 장면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역점사업이었다.

장면 정부는 국토건설사업을 통해 국민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심각한 실업자 구제의 방안으로는 이만한 정책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부는 이 사업의 추진을 위해 국토건설본부를 설치하고 장면 국무총리가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

민주당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국토건설사업을 진행하다가 5ㆍ16으로 탈권당하고 말았다.

박정희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경제발전을 다짐했다. 앞서 말한대로 정권의 정통성을 굳혀 나가는 유일한 선택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5ㆍ16 직후부터 이를 체감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1년 5월 20일경 장면 정부 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안한 당시 산업은행 조사부 간부 김성범, 고려종합연구소회장 정소영, 전 농업경제연구소장 백용찬을 집무실로 불러 경제개발 계획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들은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에서 만들었던 계획안을 토대로 두달 만에 1차 5개년 계획안(10년 내에 경제규모를 두 배로 늘린다는 내용의 골자)을 마련하여 박정희에게 제출,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정씨는 29세, 백씨는 32세였고, 가장 연장자인 김씨가 37세였다. 결국 1차 5개년 계획의 밑그림을 그리는 임무가 이들 20, 30대 젊은 인재들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1차산업 분야는 백씨가, 2차산업은 김씨가, 3차산업은 정씨가 각각 맡았다. 이들은 “내 일생에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며 지금까지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군사 정부가 경제 개발 계획을 서두른 이유는 무엇일까. 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장이었던 유원식(작고, 전 협화실업 회장) 대령의 증언을 들어보자.

“우리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도 있고 근대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지적 수준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국내외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경제개발 계획을 만든 것은 5ㆍ16 주체 세력들의 자존심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자존심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박정희는 세 사람이 졸속으로 마련된 경제개발계획안이지만 이를 정부정책으로 받아들이고 보완하면서 추진하였다. 1962년 1월 5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이것은 미국의 대한정책 또는 아시아정책과도 합치되었기 때문에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우월성을 보여줄 수 있었던 한국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대한 군사적 봉쇄 및 동남아에서 공산권과의 대결을 위한 반공 보루의 구축을 매우 중요한 문제로 인식했다. 미국은 한국을 동아시아의 반공 보루로 만들기 위해 한국에 지속적으로 부흥ㆍ방위원조를 제공했다.

특히 박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그 내용과 실행에서 케네디 행정부의 대한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발전의 시대’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우월성을 군사력이 아닌 경제 부흥을 통해 입증하기를 원했다. 이는 직접 침략보다 경제 실정에 따른 불만과 이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이 공산주의의 토양이 된다는 사고에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국이 제3세계에 자금(경제 원조), 기술(장기 경제개발 계획, 지역 개발 등) 사상(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선전과 교육)을 투입하여 전통사회가 근대사회로 급속히 이행하도록 체계적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정권의 명운을 걸다시피하면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성장여건의 조성을 위한 기본방향을 ① 전력ㆍ석탄 등의 에너지공급원의 확보, ② 농업생산력의 증대, ③ 기간산업의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의 충족, ④ 수출증대를 주축으로 하는 국제수지의 개선, ⑤ 기술의 진흥 등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였다. 성과는 경제규모면에서는 이 기간의 연평균 성장률이 7.8%로서 계획을 초과하였고, 특히 광공업부문이 급성장하여 산업구조의 개선에 적지 않은 진전을 이루었다.

즉 전기업을 포함한 광공업의 연평균성장률은 14.3%, 농수산업은 5.6%,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이 8.2%를 나타냄으로써 목표연도의 산업구조는 기준연도(1960)의 농림수산업이 37.3%, 광공업이 19.0%, 사회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이 43.7%로 개선되었다. 이리하여 성장면에서는 계획목표가 달성되었으나, 자본형성면에서는 계획기간중 연평균투자율이 15.6%로서 당초 계획의 22.6%에 비하여 7.0%포인트나 낮았다.

박정희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어느 정도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자 민주주의의 틀을 이탈하여 ‘개발독재’의 길 즉 억압적 정치를 강행했다. 그리고 외국자본의 유치, 즉 일본자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2년부터 시행된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군사정권은 자금확보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애초에 대부분의 재원을 내부자본으로 계획했으나 이를 위한 화폐계혁에 실패하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측은 기간산업의 육성보다는 노동집약적인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 발달과 외국 자본의 유치, 수출 위주의 산업화 전략으로 경제개발계획을 바꿀 것을 권고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의 제3세계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근대화론’에 따라 한국 역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적 수직분업체계 안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고, 이후 한국 경제는 노동집약적, 외자의존적, 수출지향적인 구조로 나아가게 되었다.

2019-04-09 13:40:33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1   hermes [ 2019-04-09 14:17:17 ]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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