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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근혜가 아버지의 피를 닦고 ,,,
작성자 hermes

1979년 10월 26일 밤, 대통령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죽음을 당하자 많은 국민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국장’이 치러졌다. 9일장을 마치고 난 뒤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조문객을 계속 맞이했다.
“나는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터져나오는 오열을 참을 수 없었다. 비서실장이 전해준 아버지의 옷은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수술한다고 여기저기 찢어놓아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옷을 보고 있자니 굵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몇 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스쳐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분도 아니고 부모님 모두 총탄에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가혹한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핏물이 가시지 않는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박근혜 자서전, 141~142쪽)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을 목격한 뒤 박근혜와 동생들이 큰 충격을 받고 평생 씻지 못할 정신적 상처를 입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종신집권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던 아버지가 졸지에 세상을 떠나자 박근혜는 동생 근령, 지만과 함께 청와대를 나와 서울 신당동 옛집으로 이사했다. 박근혜는 ‘적막한 신당동 집을 보고 있자니 첩첩산중에 버려진 심정이 이렇게 막막하고 외로울까 싶었다’고 한다.

박근혜는 ‘청와대를 나온 이후 정권 차원에서 아버지에 대한 매도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세상 인심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도 있는 것이었다. 18년간 한 나라를 이끌어온 대통령으로서 사후에 정치적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권력에 줄을 서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거짓과 추측, 비난 일색으로 매도되고 왜곡된다면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가 이루셨던 일을 폄하하고 무참히 깎아내리는 것도 모자라 무덤 속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인신공격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위의 책, 142쪽)

그런데 박근혜는 청와대를 나온 이후 어떤 정권 차원에서 그런 ‘매도와 인신공격’이 벌어졌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설마 박정희 피살 직후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최규하 행정부 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1979년 12월 12일 노태우와 함께 ‘군사반란’을 일으켜 박정희의 후계자로 나설 준비작업을 하고 있던 ‘신군부’의 우두머리 전두환이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5월 항쟁을 무력으로 억누르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 무렵 새로운 권력에 줄을 서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두환 일파에 잘 보이려고 박정희를 매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전두환 자신도 박정희를 ‘영웅’이나 스승으로 떠받들면서 실질적으로 ‘유신독재정권’을 물려받으려고 온갖 공작을 일삼고 있었다.

실제로 전두환은 박근혜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2007년 6월 1일자 동아닷컴에 실린 신동아 기자 허만섭의 글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박정희 사망 당시 청와대 집무실엔 4칸으로 된 책장이 있었다. 전두환 측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손으로 2칸을 밀자 빈 내부가 나타났다. 박정희와 독대할 때 박정희가 책장에서 돈 봉투를 꺼내 자신에게 준 것을 기억한 한 언론인이 전두환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일러준 것이다. 책장 안 비밀금고엔 9억 원의 자금이 있었다. 전두환은 이 돈을 유자녀 생계비로 박근혜에게 줬고 박근혜는 이 중 3억 원을 김재규 사건 수사 격려금으로 전두환에게 돌려줬다.”

전두환이 당시로서는 거액인 9억 원을 박근혜에게 선뜻 건넸다는 사실은 그가 ‘의리의 사나이’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박정희의 유족을 ‘따뚯하게’ 보살핌으로써 정치적으로 보상을 받겠다는 의도 때문이었을까? 그런 전두환이 실권자로 발돋움 하던 시기에 정권에 잘 보이려고 박정희를 매도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박근혜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상대의 믿음과 신의를 한 번 배신하고 나면 그 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며,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유신 때는 ‘유신만이 살 길’이라고 떠들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인생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동안 나를 잘 알고 굉장히 아낀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손익계산에 따라 태도가 달라졌는가 하면, 평소 덤덤하게 이야기를 나눈 바 없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 안타까워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사람의 안팎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새삼 깨달았다. 고마운 사람은 나에게 물 한 잔 더 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시류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으며 진실한 태도로 일관된 사람들, 진정 빛나는 이들이었다.”(자서전, 148~149쪽)

박근혜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표변하는 인심(그것이 사실이라면)을 보면서 이렇게 느꼈다면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존경하던 아버지가 과연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슬프고 흉한 일’을 저질렀는지 않았는지는 이 글의 앞 부분에서 살펴본 박정희의 삶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박근혜는 2012년 4월 이 시점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일절 동의하지 않는다. 애국지사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하던 때 일본군 장교로서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바치던 박정희의 과거에 대한 성찰이나, 퍼스트레이디를 지낸 공인으로서의 반성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의 정치적 후광인 박정희에 대한 다수 대중의 향수는 박근혜가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다. 박정희 없는 지금의 박근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의 인품이나 소양, 그리고 정치적 사고방식이 아버지를 빼어 닮았다면, 그것이 그릇된 줄 깨닫고 자신만의 창조적 이념과 정치철학을 발전시키려고 노력을 해야 유권자들이 그가 대통령이 되는 데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2019-04-09 14:12:30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cambridge [ 2019-04-09 15:00:09 ] 

더러운 자들이 아직도 사회 곳곳에 포진되었다고
개---소리로 떠들어대는 자한당 무리들이 아직도 국민의 세금으로
국회에서 똬리를 틀고 여전히 적폐활동을 하고 있는 게 답답할 뿐이다.

1   cambridge [ 2019-04-09 14:59:18 ] 

박통의 군사정권 시절.
자신의 독재통치를 (경제)압축성장으로 퉁치면서 국민의 전두엽을 파괴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Lobotomized Republic(무뇌공화국)을 낳아,
전두환 등 인간괴물이 봇물을 이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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