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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3회] 청와대 ‘일본군 장교 복장’의 박정희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면서 한일관계를 정상화하여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제공받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미국의 작용이 컸다. 2차대전 후 미국의 아시아정책의 기조는 소련의 봉쇄에 있었다. 그 축의 중심에 일본을 두고 한국을 전방에 배치하는 구도였다. 이 구도는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소련 대신에 대상이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미국이 박정희에게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토록 압박하고, 그로부터 반세기 만에 미국은 다시 미숙한 박근혜 정권을 꼬득여 한ㆍ일군사정보협정을 맺게 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핵심은 일본중심의 대륙세력 봉쇄정책이고 한국은 종속변수로 취급된다. 한일국교정상화 추진은 미국의 압력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한국, 일본, 대만 등 아시아 반공국가들의 통합을 추구하였으며, 1950년대 후반을 경과하며 좀 더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미국은 아시아 반공블록으로서의 지역통합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그에 따라 1965년 한일협정이 강행되었고, 한미일 삼각동맹체제의 완성을 실현하였다.

박정희가 한일회담을 서두른 데는 미국의 압력과 외자도입 등의 외형적인 문제와 함께 일본에 대한 자신의 심리(향수)도 작용했다. 박정희는 쿠데타 후인 1961년 11월 케네디와 회견하기 위해 미국으로 갈 때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해방 후 어느 정치지도자도 방문을 꺼려하던 일본을 박정희가 무엇 때문에 자기 발로 찾아가 수상 이케다와 두 차례씩 회담을 하고, 과거 일본인 은사들까지 만나 집권자로서의 각오와 자세를 밝혔는지는 박정희가 방일 직전 이케다에게 전한 친서와 이케다 주제 환영만찬에서의 만찬시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향수를 느낀다. 그런데 박정희의 경우 일본군시절의 향수가 유독 심했던 것 같다.

군부거사로 집권했던 그 해(1961년) 11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미국대통령 케네디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도중에 일본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한ㆍ일협상을 놓고 당시의 이케다 일본수상과 단독으로 회담한 후, 박정희는 일본 외무성에 특별히 부탁하여 만주군관학교 시절 인연을 맺었던 교장과 동창생들을 만나볼 수 있도록 요청한 적이 있었다. 외무성이 수배하여, 그 날 저녁 박정희는 동경 시내에 있는 한 요정에서 그가 군관학교 생도였던 시절의 교장과 구대장을 만나 회포를 풀 수 있었다.

그후로 박정희는 매년 연초가 되면 일군 시절의 동기와 선배들에게 연하장을 보내고 있었다. 대통령이 된 뒤, 청와대생활에서 박정희가 즐기던 한 가지 취미는,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하여 보내오는 일본의 사무라이영화를 관람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영화를 함께 본 일이 있는 한 측근 인사는 일본영화를 통하여 박정희는 어떤 향수 같은 것을 느끼는 표정이었다고 전한 적이 있다.

박정희는 젊은시절을 총독부의 교사와 5년여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장교, 그리고 일본육사를 졸업했다. 야마토혼(大和魂)까지는 몰라도 ‘일본’이 체질화된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립국가의 수반이 되어서는 과감히 청산하고 탈피했어야 한다.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말채찍을 들고 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 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5ㆍ16쿠데타나 민정이양 이후까지도 박정희의 정신세계의 한켠에는 일본군에 대한 아련한 향수와 메이지유신의 역사가 크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박정희가 일본을 방문하여 안신개(岸信介)ㆍ석정광차랑(石井光次郎)ㆍ소반선태랑(小扳善太郞) 등 일본 정계인사들과 어울려 오찬을 같이 했을 때의 에피소드는 지금도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져 온다. 그 날 점심 자리에서 박정희는 유창한 일본말로 5ㆍ16을 일으킨 자신의 동기와 앞으로의 포부에 관해 설명했다.

당시의 일본 신문보도나, 참석했던 당사자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 날 박정희는 “나는 명치유신 때의 지사(志士)와 같은 각오로 조국재건에 임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유신사(維新史)를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는가 하면, “나는 일본육사 출신이지만, 강한 군대를 만드는 데는 일본식 교육이 가장 좋다.”고 피력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유신정신’이나 ‘군인정신’을 자기 의욕과 결부시켜 찬양했던 그때가 5ㆍ16이 있은 지 불과 6개월 쯤 밖에 안될 때였던 것을 감안하면 박정희가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그 정치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일회담은 이승만 정권 이래의 외교현안이었다. 두 나라 간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은 1951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0여 년에 걸친 교섭에서도 타결점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자유당 정부에 이어 민주당 정부도 한일회담을 추진, 1960년 10월 25일 제5차 한일회담이 열렸으나 5ㆍ16쿠데타로 중단되었다.

2019-04-10 15:02:33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1   kangdong [ 2019-04-10 15:20:56 ] 

안타깝게도 그때당시 우리사회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 철저히 무시되는 사회로 변질되었다.

시리즈,,,,,,,잘 읽고 있습니다.

응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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