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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6회] 제6대 대선 윤보선 누르고 재선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 등을 실현하면서 미국ㆍ일본과 우호협력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세워 착실한 성장으로 권력의 정치사회적 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다.

반면에 야당은 시국관의 차이와 고질적인 파쟁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여기에는 중앙정보부의 공작도 적지 않았다. 1965년 6월 14일 원내 제1야당인 민정당과 제2야당인 민주당이 통합하여 제3공화국 출범 후 최초의 통합야당 민중당으로 출범했다. 민중당의 초대 대표최고위원은 박순천이었다.

그러나 민중당은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안과 베트남 파병안을 둘러싸고 당론이 양분되어, 의원직 사퇴와 당 해산을 주장하는 윤보선계가 결별, 1966년 3월 30일 신한당을 창당함으로써 통합 5개월 만에 분당되었다.

윤보선 계열의 강경파는 이해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8월 14일 공화당 단독으로 이 조약이 국회에서 비준되자 이에 반발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고 민중당을 탈당, 신한당을 창당한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이 장악한 여당 의원들에게 국회의 강행처리를 지시했다.

야당은 1967년으로 예정된 대통령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 민주구락부, 구자유당계, 일부 혁신계 및 학계인사들을 모아 신한당 창당대회를 열고 윤보선을 차기 대통령후보 및 당 총재로 선출했다.

신한당은 군정종식을 위한 정권교체를 당면 최대목표로 설정하고 전국 각지에서 공화당 정권의 비리를 폭로ㆍ규탄하는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등 대여 강경투쟁을 전개하여 민중당과 차별성을 보였다.

1963년 10ㆍ15 대권경쟁에서 불과 15만여 표 차이로 정권교체에 실패한 야당은 1967년의 대회전을 앞두고 민중당과 신한당으로 분열되어 노골적인 대립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야당의 분열상태에 대해 국민의 비판이 거세게 일자 뜻을 같이하는 재야인사들이 모여 통합작업을 벌이게 되었다.

통합작업의 결과 대통령 후보 윤보선, 당수 유진오로 하는 원만한 합의를 보아 양당의 통합작업이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후보와 당수가 분리되고 실무 9인위원회가 결성되자 통합작업은 외부의 공작이나 불순세력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전격적으로 추진되어 단일야당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1967년 2월 7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통합선언 및 창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대통령후보에 윤보선, 당수에 유진오를 선출하여 단결된 야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야당이 신민당으로 통합하여 1967년의 대회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공화당도 때를 같이하여 임전태세를 가다듬었다. 공화당은 1967년 2월 2일 장충체육관에서 제4차 전당대회를 열어 박정희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했다. 전국 대의원 2,698명과 7천여 명의 내빈이 참석해 우리나라 정당사상 최대 규모의 전당대회에서 박정희는 “영광의 승리를 위해 분발하자”면서 후보직을 수락했다.

3월 24일 대통령 선거일이 공고되고 4월 3일 입후보등록이 마감되어 5ㆍ3대통령 선거전의 막이 올랐다. 박정희ㆍ윤보선을 비롯 오재영(통한당), 김준연(민중당), 전진한(한독당), 이세진(정의당) 등 6명의 후보가 등록을 마쳤다.

공화당은 “틀림없다 공화당! 황소힘이 제일이다”, “박 대통령 다시 뽑아 경제건설 계속하자”, “중단하면 후회하고 전진하면 자립한다”는 선거구호를 내걸었고, 신민당은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갈아치자”,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봄에는 갈아치자”, “박정해서 못살겠다 윤택하게 살길 찾자”는 구호 아래 선거전에 나섰다. ‘황소’는 공화당이 상징으로 내걸었던 상표였다.

박정희는 조국근대화를 위해 농공병진정책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을 역설했고, 윤보선은 정권교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현재의 대통령 중임제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면서 정부의 경제시책을 수탈정책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유독 이념정당을 표방하고 나선 대중당의 서민호 후보는 농지개혁의 재조정, 독점재벌의 배격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선거전은 박ㆍ윤 두 후보로 압축된 가운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집권당의 이점에다 그동안의 경제개발이 국민에게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져 5월 3일 실시된 선거는 지난 대선과는 달리 손쉽게 결판이 났다. 박정희가 총 유효투표의 51.44%에 해당하는 568만 6,666표를 얻어 452만 6,541표를 차지한 윤보선을 116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5ㆍ3선거에 나타난 투표성향은 여촌야도의 전통이 무너져 도시의 지식층과 근로계층에서도 집권당 지지도를 나타내 박정희의 4년 치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데 반해, 호남 푸대접론이 생길만큼 호남에서는 여당이 패배, 여야의 지지분포가 4년 전의 남북현상에서 동서현상으로 바뀌었다.

박정희는 그의 아성인 영남지방에서 3대 1에 가까운 몰표를 얻어 윤보선을 압도적으로 눌러 대세를 결정지었다. 영남지방에서 나타난 득표의 차이는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눌러 이긴 전체의 표수 차이를 앞질렀다.

윤 후보는 영남지방에서 참패한 대신 서울ㆍ경기ㆍ충남북에서 다소 리드하기는 했으나 영남과 강원의 실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영남은 박정희의 표밭이 되었다.

이 선거과정에서 윤 후보의 지원유세에 나선 장준하 <사상계> 사장이 “박정희는 우리나라 청년의 피를 베트남에서 팔아먹고 있다”는 등의 발언으로 ‘국가원수모독죄’ 혐의로 구속되는 등 선거 후에 야당인사들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이 불었다.

2019-04-13 08: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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