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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0회] 향토예비군조직, 공안조성하며 개헌음모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5ㆍ16쿠데타의 명분으로 국가안보와 반공을 내세우고, 군정 2년에 이어 대통령이 되고 재선에 성공하여 7년여 동안 집권하였다. 그런데 북한 특수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인근 세검정 고개까지 들어왔다. 국가안보가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박정희는 무책임한 책략가다. 책임정치가 구현되는 정상적인 국가라면 마땅히 퇴임의 사건인데도 역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국회와 국민을 겁박하면서 향토예비군설치법을 개정하여 모든 청장년을 예비군 조직으로 묶었다.

당초 향토예비군의 임무는 △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현역군부대의 역할 △ 무장공비침투 지역에서 무장공비 소탕 △ 경찰력만으로 진압할 수 없는 무장소요 진압 등이며, 예비역 장교, 군사관, 하사관 예비역병과 보충역 등으로 조직한다. 거주지 또는 직장을 단위로 하여 지역예비군이나 직장예비군으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향토예비군은 이후 청장년들의 생업은 물론 사회활동에 크게 저해 요인이 되었으며 박정희는 이 방대한 조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박정희의 권력은 원초적으로 총구에서 나왔다. 이 태생적인 한계. 즉 쿠데타 콤플렉스가 그를 독재자로 만들었다.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정당성이 없다. 정당성 없는 권력은 본능적으로 폭력화된다.”

예비군 조직은 박정희의 정치적 욕망의 폭력조직으로 악용되었다는 비판이 따랐다. 박정희는 여러 증언에 따르면 평화적 방법으로 정권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박정희는 이승만이 영구집권을 기도하다가 1960년 4월 혁명으로 쫓겨난지 9년 만에 다시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치학자 새뮤열 버틀러는 ‘권력은 마주(魔酒)’라고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임자가 국민의 봉기로 권좌에서 쫓겨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장기집권을 기도하는 개헌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전혀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 무지한 행동이었다.

박정희는 1968년 1월 10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내 임기 중에는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경”이라며, 일단 속내를 감췄다.

그러나 1967년 총선거를 유례 드문 부정선거로 개헌선을 확보하고 동베를린사건과 무장공비 침투 그리고 향토예비군을 조직한 그는 권력지향의 충성분자들을 동원하여 서서히 개헌에 대한 애드벌룬을 띄우기 시작했다.

어느 시대나 독재자 주변에는 아첨배들이 줄을 선다. 공화당 초대 총재로서 끝까지 3선개헌을 반대했던 정구영의 증언.

개헌구상을 맨 먼저 한 사람들이 공화당의 소위 4인 체제야. 4인 중 김성곤ㆍ김진만ㆍ백남억, 그리고 국회의장 이효상, 이 사람들은 모두 민간 출신이고, 김진만과 김성곤은 자유당 출신이지. 이 사람들이 개헌 구상을 얘기한 것이 6,3 사태 때야. 물론 그때는 박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해서가 아니고 내각책임제 헌법 구상이지.

바로 이런 사람들의 개헌 구상과 대통령 측근들의 장기집권 구상이 어우러져 나타난 것이 3선개헌 공작이야. 그래서 이 사람들이 3선개헌의 추진 주체가 되었다고 나는 보고 있어.

박정희가 자기 손으로 만든 제3공화국 헌법 제69조 3항은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3선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이 남긴 교훈을 살린 것이다. 3선개헌은 야당과 국민뿐만 아니라 공화당 내부에서도 반대자가 많았다. 5ㆍ16쿠데타를 주동한 김종필은 오매불망 ‘그날’을 노렸다. 당내는 물론 권력 내부에 김종필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핵심인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비서실장 이후락, 그리고 공화당 내 반김종필세력들은 1968년 내내 공화당 내 정지작업을 진행했다. 백남억ㆍ길재호, 김성곤, 김진만 네 사람이 정책위원장, 사무총장 등을 차지하고 이른바 ‘4인체제’를 구축한 다음, 김종필 계열 등 개헌반대세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공화당 일각에서는 중진 김용태 의원을 중심으로 국민복지회를 만들어 김종필을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하고자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만든 문건이 정보부장 김형욱의 손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복지회 조직을 이미 듣고 뒷조사를 김형욱에게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김형욱의 증언이다.

“각하! 이 건은 조용히 처리하십시다.”
“왜?”
“각하께서 3선을 하실 생각도 안하고 계신데 이 사건이 국민에게 알려지면 공화당 내부에서 마저 반대가 심각하구나 하고 국민들이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부당한 항명(抗命)이라 할지라도 밑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항명을 많이 받는 지도자는 지도자로서의 권위에 손상을 입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박정희의 의표를 찌르고 들어갔다.

나의 질문은 사실은 박정희기 기필코 3선개헌을 할 결의를 가지고 있는 가를 다시 한번 탐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성격상 파르르 화를 잘 내는 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집권 이후 자기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 식으로 제일이라는 신념, 자기의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다는 가부장적 권위의식이 흔들려서는 잠시도 배겨나지 못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었다.

“왜 조용히 처리해? 그따위 놈들을 가만 두란 말인가? 난 지금 김종필이란 놈이 괘씸해서 견딜 수 없단 말이야. 관련자를 전부 구속하여 조사하시오. 특히 국회의원이란 작자들은 더 엄중히 하시오. 배은망덕한 놈들 같으니라구!”

2019-04-18 13: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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