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층이 부패타락하고 경제발전의 과실이 특수층으로 흘러갈 때 일반 국민은 여전히 빈곤과 압제에 시달렸다. 향토예비군은 청장년들의 공사활동을 억제하는 사슬이 되고, 일용노동자 등 서민층 생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박정희는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하면서 가장 경계한 것이 대학생들이었다.
야당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분열과 매수 등 정치공작으로 조종하고, 노동계는 아직 크게 두려워 할 정도로 세력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론계 역시 경계의 대상이지만 사주ㆍ간부들을 대상으로 통제와 떡고물로 요리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학원이었다. 한일회담을 반대할 때는 수만 명의 학생들이 광화문까지 진출하여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1970년대 초 대학생들을 통제하고자 학원병영화의 일환으로 군사훈련을 강화시켰다. 1971년 1학기부터 1969년에 정규과목으로 채택된 교련교육을 종래 주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리고 집체교육까지 부과하여, 재학 중 무려 71시간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
교관도 전원 현역으로 교체하는 등 학원병영화를 강화ㆍ가속화시켰다.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 대비한 조처였다. 일반 청장년들에게는 향토예비군으로, 대학생들에게는 교련으로 묶어 통제한 것이다. 이 시기부터 대학가의 핫 이슈는 교련반대에 모아졌다. 박정희는 교련반대 학생시위를 가혹하게 처벌했다. 군대로 징집한 학생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