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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7회] 제8대 총선 야당약진, 각종 파동 잇따라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대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제8대 총선을 조기에 실시했다.

5월 25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은 내분에 휩싸였다. 유진산 당수가 자신의 선거구인 영등포 갑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면서 벌어진 자중지란이었다. 유진산이 박정희의 인척이 출마한 자신의 선거구를 포기하고 무명청년을 공천하면서 신민당에서는 이른바 ‘진산파동’이 일어났다.

유진산 당수와 양일동ㆍ고흥문ㆍ홍익표 세 운영위원회 부의장이 사퇴하고 그 다음 서열인 김홍일 전당대회 의장이 당수권한대행을 맡아 간신히 당을 수습하고 총선에 대비했다.

박정희의 공화당은 “중단없는 조국근대화”를 구호로 내걸고 원내 안전의식을 주장하면서 행정조직을 선거운동에 동원하고, 신민당은 “총통제 음모 분쇄”를 위해서 많은 야당의원의 당선을 호소했다. 총통제는 여전히 정가의 핵폭발물이 되고 있었다.

선거과정에서 갖가지 부정이 자행되었다. 신민당은 정부 여당의 원천적 부정선거 내용으로 ① 선거인명부의 이중등재 ② 전입ㆍ전출을 이용한 주민등록 조작 ③ 공무원을 근무지소속 투표구로 전입 ④ 직권말소 등에 의한 선거권 박탈 등을 들었으며, 표면적인 부정선거 내용으로 ① 경찰의 야당유세 방해 ② 야당후보 및 운동원에 대한 폭행 및 협박 ③ 야당 참관인 매수 ④ 공무원의 선거운동 ⑤ 사전 기표용지 배포 등을 폭로했다.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에 대한 살해음모가 지방유세 도중에 자동차사고를 가장하여 발생하기도 했다. 그는 위기일발로 살아남았다.

개표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현상을 나타냈다.

여야는 물론 국민도 함께 놀란 결과였다.

모두 204명의 의석 중 공화당이 지역구 86석에 전국구 27석, 신민당이 지역구 65석에 전국구 24석, 국민당 1석, 민중당 1석으로 신민당이 무려 89석을 차지한 것이다. 공화당의 113석과 신민당의 89석이라는 의석수는 의정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를 보인 것이었다.

신민당은 개헌저지선 69석에서 20석을 더 확보한 셈이었다.

산술적으로는 여당의 승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야당의 약진이었다. 진산파동이라는 미증유의 적전내분을 겪으면서, 더욱이 총선을 총지휘할 당수조차 부재한 상황에서 신민당의 약진은 대단한 성과로 나타났다.

득표율에 있어서도 야당의 약진은 두드러졌다.

총 유권자 1,561만 258명 가운데 73.2%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공화당의 득표율은 52.26%이고, 신민당의 득표율은 47.64%였다. 이 선거는 여야균형 국회를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행정부에 대한 견제세력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권자들이 장기집권에 들어선 박정희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었다.

서울에서는 진산파동의 계기가 된 영등포 갑구를 제외한 전지역을 신민당이 석권했으며, 부산ㆍ대구에서도 여당은 1석씩밖에 당선시키지 못했다. 32개 도시의 64개 선거구에서 공화당은 17석밖에 당선되지 못했으나 신민당은 47석을 차지해 두드러진 야도현상을 나타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의 엄중한 심판이었다.

대통령선거와 총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사회분위기가 크게 완화되었다. 5ㆍ16군사쿠데타 이래 억눌려 있던 국민의 인권의식이 크게 신장되고 이에 따라 언론도 비교적 자율성을 찾게 되는 등 어느 때보다 사회적 분위기가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학생들이 공명선거감시단으로 선거에 참가하는가 하면 지식인들도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터진 것이 1971년 여름의 의료파동에서 시작하여 사법파동, 광주대단지사건, 월미도사건, 한진기술자 KAL빌딩사건, 조세저항사건 등이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ㆍ사태는 사법파동과 광주대단지ㆍ월미도사건이다.

서울고법 판사들이 민복기(왼쪽) 대법원장에게 대통령을 상대로 사법부 독립 약속을 받아야 한다며 결단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전달하고 있다.

사법파동은 1971년 7월 28일 서울지방검찰청이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재판장 이범렬 부장판사와 배석 최공웅 판사, 입회서기 이남영을 피의자로 구속영장을 신청한 데 반발, 현직판사들이 집단사표를 제출함으로써 발생했다. 검찰은 재판부가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심리과정에서 제주도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담당변호인으로부터 왕복항공료와 향응을 받았다는 혐의로 영장을 신청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형사지법 판사 전원은 이 사건 직전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판결, 형사지법의 잇단 무죄판결에 대한 감정적 보복이라면서 일제히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제출은 가정법원ㆍ전주ㆍ청주ㆍ대구ㆍ부산지법으로 번지고 사법권 수호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가운데 국회로까지 확산, 정치문제화 되자 검찰 측이 사건을 백지화시킴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같은 해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하여 일으킨 빈민항쟁으로, 6시간 동안 사실상 광주대단지 전역을 장악한, 해방이후 최초의 대규모 도시빈민투쟁이었다.

실미도사건은 8월 23일 아침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수용 중이던 특수병들이 경비병 23명을 사살한 후, 섬을 탈출해 인천을 거쳐 버스를 타고 서울 영등포까지 총기를 난사하여 진입한 뒤 자폭한 사건이다.

모두 박정희 정권의 폭압통치와 비리가 빚어낸 결과였다. 그는 집권 10년 동안 국정을 전횡하면서 1인독재의 길을 걸어왔다. 이에 맞서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국민이 각성하고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정농단을 견제하기 위해 서울 등 대도시에서는 야당의원들을 다수 뽑았다.

2019-05-01 14: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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