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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9회] 어용교수 ‘평가교수단’의 과잉평가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국민의 저항과 야당의 비판을 수렴하거나 시정하려는 노력 대신 더욱 강압적인 수법으로 대응했다. 독재자들이 걷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독재자론에서 제기되듯이,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무오류성을 맹신한다. 자신의 행위는 언제나 정당하고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범이다.

여기에는 관제화된 언론과 어용지식인 집단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다. 일부 언론인은 아예 정권에 참여하여 홍보맨 역할을 하고, 대학교수들은 평가교수단에 참여하여 각종 아이디어를 내거나 정책개발 혹은 대통령 홍보에 나섰다.

5ㆍ16 이후의 한국 정치에는 군인 아닌 또 하나의 아마추어 정치세력이 게재되어 왔다. 대학교수들이었다. 그들은 앞장선 군인들에 가리워 전면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5ㆍ16 후, 특히 군정과 민정 초기에 한국의 정치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었다. 그들의 영향은 사실상 60년대와 70년대의 박정희 정권의 전기간에 걸쳤다고 볼 수 있다.

정치에 관해서는 똑같이 아마추어이면서도 이론적인 무장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현실에 참여하고 나선 교수들은 5ㆍ16의 이념구축, 일반정책 수립, 법률 개폐작업으로부터 정당조직, 심지어는 정치정략에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들은 군정 당시 말썽많았던 민족적 민주주의와 한국적 민주주의같은 5ㆍ16 이념을 설정하는 데 일조를 했고, 경제성장정책의 아이디어그룹으로 각광을 받기도 한 반면 통화개혁ㆍ농어촌 고리채 정리 등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평가교수단’이 1971년 펴낸 <민족의 등불>이라는 책자로 된 보고서를 보면 박정희가 독선 독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동정이 간다. 그는 집권 후 어용인물들 속에 둘러싸였다. 이 책의 필자는 최주철(내각기획실장), 고영복(서울대), 김영희(연대), 김점곤(경희대), 민병기(고대), 박준규(서울대), 여석기(고대), 유형진(건대), 이정식(동국대) 등이다. ‘보고서’의 일부를 보자.

첫째로 청렴하고 서민적인 인물로 알려졌던 장군 박정희의 지도자로서의 출현은 그 시점까지 한국의 역사를 지배해왔던 소수의 특권집단을 권좌로부터 축출하고 민중과 밀착한 새로운 지도세력의 육성을 가능케 할 듯이 보였으며,

둘째로 정치철학의 빈곤으로 허덕이던 당시의 고루한 상황 속에서 그가 내걸었던 민족주의이념은 단연 파벌적 권력행장의 정치풍토를 일소하고 민중의 민족적 자각과 협조를 기반으로 하여 숙원의 자립적 민족국가상을 실현해 갈 의욕을 북돋게 해주었고,

셋째로 그의 강력한 개혁에의 호소는 사회의 전면적 재개편을 선도하고 안일과 무사주의의 유산을 단호하게 추방하여 사회 각층에 혁신과 건설의 국민적 모랄을 파급시키려는 웅지를 보였기 때문에 그의 출현을 지켜 본 국민들은 한편으로는 불안한 눈초리로 보면서도 그래도 민족의 앞날을 위해 혁명이 명실공히 성공했으면 하고 희구했던 것이다.

교수들은 어디에서도 쿠데타나 헌정유린, 3선개헌, 부정선거ㆍ대학휴교령 등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민족주의이념’을 합리화시켰다. 일제강점기 만군ㆍ일본군 장교 출신을 민족주의자라고 한다면 당시 독립운동가나 학병 탈출 광복군들의 이념은 설 땅을 잃게 된다. 박정희는 어용학자들에 둘러싸여 다시 한번 정치적 도박을 시도한다.

4ㆍ27 대통령선거 때부터 공명선거를 요구하며 박정희 정권의 비판에 앞장서온 대학생들은 교련교육 반대라는 새로운 이슈를 내걸고, 5ㆍ25 총선거를 전후하여 더욱 강력하게 부정부패 척결과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한일굴욕회담 반대투쟁이 절정을 이루었던 6ㆍ3사태 이후 가장 치열한 시위를 벌였다.

강력한 야당의 등장과 각종 사태, 저항운동, 여기에다 집권당의 항명파동까지 겹치고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자 박정희는 정권의 안위를 우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1971년 10월 15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박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내려지자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은 즉각 군 당국에 병력출동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군 당국은 수도경비사령부와 공수특전단 및 경찰병력을 서울시내의 6개 대학에 진주시켰다. 군이 진주한 대학은 서울대의 문리대와 법대, 고대ㆍ연대ㆍ성대ㆍ경희대ㆍ서강대ㆍ외대 등이었다. 대학에 위수령이 발동한 것과 동시에 서울상대ㆍ전남대 등에 무기한의 휴업령이 내려졌다.

중앙대ㆍ국민대ㆍ건국대ㆍ한신대ㆍ숙대ㆍ이대 등은 자체 휴강에 들어가 서울의 대학가는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각 대학은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23개 대학에서 177명의 학생을 데모 주동자로 몰아 제적시켰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들은 유신쿠데타를 도모하기 위한 전초작업의 시발이었다.

2019-05-09 15: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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