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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0회] 호랑이 등에 탄 ‘긴조시대’ 5년 11개월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나 개념이 전혀 없었다. 그에게 수평적인 권력관계는 인식되지 않았다. 오직 지배와 피지배의 수직관계가 있을뿐이다.

오랜 군대생활 특히 만군과 일군시절 그리고 일본 천황제와 메이지유신을 동경해온 터여서 민주주의는 체질상 맞지 않았다. 한때 민족적 민주주의나 행정적 민주주의를 내건 바 있었으나 그건 선거용 아니면 대국민 선전구호였을 뿐이다.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정상적인 민주체제로의 환원을 요구하는 학생ㆍ지식인ㆍ국민에 대한 대처 방식을 보면 이를 확인하게 된다.

1974년 새해가 밝으면서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국민의 소리는 더욱 거세게 확산되었다. 심지어 박정희 정권과 정치적 유착설이 나돌던 유진산의 신민당까지 1월 8일 개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박정희는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저지하는 강압책을 들고나왔다.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을 반대, 부정, 비방하거나 개헌을 주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하고 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며(1호), 이에 따른 비상군재를 설치한다(2호)고 선포했다. 일제식민통치 못지 않은 정치적 폭거였다.

긴급조치는 원래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대통령이 내정, 외교, 국방, 경제, 재정, 사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서 내리는 특별한 조치다.

그러나 유신헌법 제53조에 규정된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단순한 행정명령 하나만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무제한의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초헌법적 권한으로서, 사실상 반유신 세력에 대한 탄압도구로 악용되었다.

1974년 1월 8일, 제1, 2호가 처음 발동된 이래 1975년 5월 13일, 제9호에까지 이른 대통령 긴급조치는 박정희 암살로 1979년 12월 8일, 제9호가 해제되기까지 만 5년 11개월 동안 이른바 ‘긴급조치 시대’가 계속되었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그야말로 권력의 광기가 절정에 오른 암흑의 시대였다.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3권 위에 군림하게 되고, 권렵분립과 의회민주주의는 형해화되었다.

긴급조치 1호는 헌법개정 관련 외에도 △ 유언비어의 날조ㆍ유포 금지 △ 금지행위의 선동ㆍ선전 및 방송ㆍ보도ㆍ출판 등 전파행위 금지 △ 이 조치의 위반자 및 비방자는 영장 없이 체포ㆍ구속ㆍ압수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과 1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1월 15일 비상보통군재 검찰부는 전 <사상계> 사장 장준하와 백범사상연구소 대표 백기완을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첫 구속하고, 21일 도시산업선교회 김경락 목사 등 종교인 11명을 같은 혐의로 구속하는 등 종교인과 학생들을 다수 구속했다. 정부는 이어 4월 3일 민청학련 사건을 기화로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에 족쇄를 채우기 위해 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이 조치는 △ 전국민주청년학생총동맹(민청학련)과 관련되는 제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또는 회합ㆍ통신ㆍ편의제공 등으로 구성원의 활동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 민청학련 및 관련단체의 활동에 관한 문서ㆍ도서ㆍ음반ㆍ기타 표현물을 출판ㆍ제작ㆍ소지ㆍ배포ㆍ전시ㆍ판매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ㆍ수업ㆍ시험을 거부하거나 학교관계자 지도ㆍ감독 하의 정상적 수업과 연구활동을 제외한 학내외 집회ㆍ시위ㆍ성토ㆍ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 집단행위 금지 △ 이 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에 대해서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서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고,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는 폐교처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조치로 내무부 치안국은 민청학련 관련자 자진신고 기간에 자수하지 않은 서울대생 이철, 서울대 졸업생 유인태, 강구철 등을 전국에 현상수배하고, 비상보통군제는 7월 16일 민청학련 배후지원 혐의로 구속기소된 윤보선ㆍ박형규ㆍ김찬국 등을 내란선동 및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첫 공판을 여는 등 초강경의 탄압정책을 계속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라는 폭력적인 조치를 단행하면서 국민을 현혹시키고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용공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른바 ‘문인간첩단사건’이다. 2월 25일 서울지검 공안부 정명래 부장검사는 서울을 거점으로 한 문인간첩단을 1월 26일 적발했으며 이호철ㆍ임헌영ㆍ김우종ㆍ정을병ㆍ장병화 등 5명의 문인을 반공법 위반 및 간첩 혐의로 구속하고, 언론인 천관우 등에 대해 계속 조사중이라고 발표했다.

긴급조치가 발효되어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던 10월 31일 서울형사지법 항소 3부는 선고공판에서 이호철ㆍ임헌영ㆍ김우종, 장병화에게 각각 징역 1년에서 1년 6개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모두 석방했다. 훗날 이 사건은 재심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거듭되는 긴급조치에도 국민의 반유신 저항운동이 거세게 확산되자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제9호를 선포했다.

서울농대생 김상진 군의 할복자살을 계기로 유신헌법 철폐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것이다.

그 내용은 △ 유언비어의 날조ㆍ유포 및 사실의 왜곡ㆍ전파행위 금지 △ 집회ㆍ시위 또는 신문ㆍ방송 기타 통신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ㆍ선포하는 행위 금지 △ 수업ㆍ연구 또는 사전에 허가받은 것을 제외한 일체의 집회ㆍ시위ㆍ정치관여 행위 금지 △ 이 조치에 대한 비방행위 금지 △ 금지위반 내용을 방송ㆍ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ㆍ소지하는 행위 금지 △ 주무장관에게 이 조치의 위반 당사자와 소속학교ㆍ단체ㆍ사업체 등에 대해 제적ㆍ해임ㆍ휴교ㆍ폐간ㆍ면허취소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 부여 △ 이런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긴급조치 9호의 해제는 1669일 9시간에 이르는 유신독재의 종막이었다

긴급조치 9호가 1979년 12월 8일 해제되기까지 5년 11개월 27일 정확히 1,669일 동안 헌법반대나 개헌에 관한 국민들의 입과 귀는 막혔고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봉쇄되었다.

긴급조치 9호 시대는 민주주의 암흑기로서 8백여 명의 구속자를 낳아 ‘전국토의 감옥화’, ‘전국민의 죄수화’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긴급조치 9호는 5년 11개월 동안 학생, 교수, 문인, 정치인, 종교인, 시민 등 모두 1,389명이 이 조치로 옥고를 치르고, 9호 관련 판결은, 1,289건으로 피해자 수만 974명에 이르렀다.

박정희가 명령한 긴급조치 시대야말로 우리 헌정사상 전두환 6공정권기와 더불어 전무후무한 인권탄압과 독재의 암흑시대였다. 긴급조치는 민주정부에서 무효화가 되었고, 피해자들은 대부분 재심에서 사면 복권조치가 이루어졌다.

2019-06-15 09: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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