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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2회] 정권위기 희생양 인혁당사건 날조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작동하면서 더욱 메시아적 존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가장 위험한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메시아는 무오류성과 과격성을 동반한다. 그래서 거침없이 ‘마녀사냥’을 지시한다.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여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사람을 구속한 지 3주일 후인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에 의해 인혁당사건이 다시 발표되었다. 1차 사건이 있은 지 10년 만에 또 인혁당 이름을 꺼낸 것이다. 혐의사실도 10년 전과 거의 똑같았다. 현 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했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하면서 이 사건 관련자 서도원ㆍ도예종ㆍ김용원ㆍ우홍선ㆍ송상건ㆍ여정남ㆍ김한덕ㆍ유진건ㆍ나경일ㆍ전재권 등 23명을 구속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의 소급이 필요하다.

박정희는 야당과 학생들의 한일 굴욕회담 반대운동이 거세게 전개되던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통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이란 것을 발표했다.

김형욱은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 전국에 수배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박정희 18년 집권 동안 가장 많은 의혹과 물의를 빚은 사건 가운데 하나인 인혁당 사건은 이렇게 하여 세상에 알려지고, 10년 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날조하여 8명의 아까운 인재를 처형했으며, 많은 연루자들이 혹독한 고문과 장기형의 고통을 겪게 하였다.

윤보선 전대통령의 전언에 따르면 박정희가 자신의 집권기간 중 “크나큰 실책이라면 인혁당 8명을 처형한 것이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고 하면서 정부요인들 앞에서 후회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박정희도 이 사건이 조작된 점을 뒤늦게나마 후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6년 7월 인혁당재건위 재심 5차공판의 증인 김종대 씨에 따르면 박정희가 말년에 술에 취하면 인혁당 관계자 8명의 사형을 후회했다고 윤보선의 말을 전한다.

두 차례의 인혁당 사건은 사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가혹한 고문, 연루자들의 처형과 중형 선고, 외국인 목사와 신부의 추방, 유가족 탄압과 시신 탈취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인혁당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김형옥이 발표한 1차사건의 개요부터 살펴보자.

인혁당은 1962년 1월 북괴로부터 특수사명을 띠고 남파한 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이던 우동읍과 동 간사장 김배영ㆍ김영광,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도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표, 전 진보당원 김한득, 빨치산 출신의 박현채 등이 참가하여 창당 발기인대회를 갖고, 외국군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 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여 발족했다.

인혁당은 창당 후 조직을 확대해오다가 1964년 4월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동당 중앙상임위원인 도예종ㆍ정도영ㆍ박현채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함과 동시에 학생 데모를 4ㆍ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케 함으로써 현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

인혁당은 학생ㆍ언론인 등을 포섭, 현정권이 타도될 때까지 학생 데모를 계속 조종함으로써 북괴가 주장하는 노선에 따라 남북평화통일을 성취할 것을 목표로 투쟁하다가 6ㆍ3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그들의 죄상과 당 조직망이 폭로될까 우려한 나머지 학생 데모 주동자와 일체의 연락을 끊고 지하로 잠복, 기회를 노리던 중 검거되었다.

이것이 박정권이 인혁당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관제’ 내용이다.

반유신투쟁의 고조로 위기를 느끼던 박정희는 국면 전환용으로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이들을 공산주의로 몰아 정권안보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인혁당은 그 실체가 없음은 물론 사건에 연루된 피고인들의 법정진술까지 변조할 정도로 철저히 조작한 사건이었다.

1차 인혁당 사건이 ‘처리’된 10년 뒤인 1974년 봄, 대학가의 반유신투쟁이 격렬해지면서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 4호로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고,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날조했다. 이 사건으로 교수와 학생 등 모두 254명이 구속되어 영남대 출신인 도예종 등 7명이 인혁당 연루자로 몰려 사형이 집행됐으며, 경북대 출신 여정남도 민청학련 관련자로 역시 처형되었다.

1964년 처음으로 알려진 인혁당 사건이 10년 뒤에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다시 포장되어 많은 희생자를 가져오기까지에는 ‘곡절’도 있었다.

김형욱이 발표한 1차 인혁당 사건은 그해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중앙정보부의 어마어마한 발표 후 이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은 18일간의 철야수사에도 기소할 만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사건담당 검사진은 이용훈(부장검사)ㆍ최대현ㆍ김병금ㆍ장원찬 검사 등이었다. 검찰은 관련자들이 중앙정보부 조사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것을 밝혀냈다.

담당검사들은 “관련자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불온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고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최 검사를 제외한 세 검사는 기소 거부와 함께 사표까지 제출했다.

이렇게 되자 검찰과 중정이 발칵 뒤집히게 되고, 궁지에 몰린 김형욱은 압력을 넣어 숙직담당 검사를 통해 가까스로 서명토록 하여 간신히 기소할 수 있었다.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고 관련자들이 수사기관에서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당한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이렇게 되자 검찰은 서울고검 한옥신 검사에게 사건의 재수사를 지시했다. 그 결과 검찰은 당초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ㆍ기소한 26명 중 학생 등 14명에 대한 공소를 취하했고, 나머지 도예종 등 12명의 피고에 대해서도 반국가단체 구성의 국가보안법 위반을 반국가단체의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혐의로 공소장을 경미하게 변경했다.

이렇게 하여 대법원에서는 이들에게 최고 3년에서 1년까지의 가벼운 형량이 선고되었다. 정보부의 어마어마한 발표에 비해서는 태산동명(泰山動鳴)에 서일필(鼠一匹) 격이었다.

당시 인혁당 사건 관련자로 구속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도예종(40. 무직), 박현채(30. 서울대 강사), 정도영(39ㆍ합동통신 조사부장), 이재문(31ㆍ 대구매일신문 기자), 허표(31ㆍ부산 봉래초등학교 교사), 박상흥(45ㆍ서적상), 김경희(27ㆍ민중서관 사원), 전무배(33ㆍ서울신문 기자), 박중기(29ㆍ한국여론조사 취재부장), 양춘우(29ㆍ무직), 서정복(24ㆍ서울문리대 철학과 4년), 김정강(25ㆍ서울문리대 정치과 3년), 김정남(22ㆍ서울문리대 정치과 3년), 김중태(24ㆍ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현승일(21ㆍ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김도현(21ㆍ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김승균(26ㆍ성균관대 동양철학과 4년) 등이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4년 4월 3일, 박정희는 학생들의 대규모적인 반유신 저항운동을 봉쇄하고자 이날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했다. 그리고 4월 25일 중앙정보부 부장 신직수를 통해 학생데모의 배후에 공산당의 조종이 있었다는 낸용의 ‘민청학련사건’을 발표했다.

박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하면서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한 것은 인혁당이라고 새로운 사실을 주장했다. 법무장관 황산덕을 통해 밝힌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내용(요지)은 다음과 같다.

인혁당은 남한에 강력한 지하당을 조직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북괴간첩 김상한이 재남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1961년 1월에 조직한 지하당이다.

인혁당의 조직과 활동상황은 1964년 6ㆍ3사태 배후조종자로서 인혁당 관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처음으로 드러났는데, 당시 김상한과 재정책 김배영이 1962년 5월 월북하고 없었기 때문에 검거된 자들은 고문에 의한 조작설을 유포, 법정투쟁을 통해 극히 경미한 형을 받았다.

그 뒤 1967년 김배영이 인혁당 재건지령을 받고 다시 남파되었다가 검거되어 인혁당의 진상이 뒤늦게나마 입증되었으나 일사부재리의 원칙 때문에 다시 처벌할 수가 없었다.

정부의 이와 같은 발표와 더불어 인혁당 연루자들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은 6월 15일부터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기까지 약 10개월이 걸렸다. 3심을 거치는 동안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피고인들의 형량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특히 도예종ㆍ서도원ㆍ하재완ㆍ이수병ㆍ김용원ㆍ우홍선ㆍ송상진ㆍ여정남 등 8명의 피고인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형이었다.

2019-06-21 08: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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