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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도마'경전을 좋아하게 되었다
작성자 zenilvana

2014년 9월 5일 새벽 3시 반에 잠이 깨었다. 다시 자보려고 무진 애를 썼구먼. 잠간 눈을 붙이고 시계를 살피면 아직도 4시가 않되는 기라. 꿈속에 묻던 단어가 깨어서도 머릿속에서 맴돌며 제대로 나오지 않는거라. 처음에는 어렴풋이 '이' 뭐라는 거였다. 그건 아니라 다시 생각해내다 보니 잠이 달아나면서, '나' 뭐였지... 얼씨구, '나 하마디'... 아이구 '나그 하마디'란 단어가 내 잠을 설치게 했던 것이다.

Nag Hammadi란 아스완 땜이 있고 그 근처에 Luxor란 고적이 있는 Upper Egypt의 한 고장의 이름이다. 아니 잠을 자면서 어째서 이런 이름을 생각해내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잠을 놓친다는 말이냐구? 실상 어떤 미국교회에서 예배보는 꿈을 꾸던 참이었다. 대단히 웅장하고 수많은 신도들 속에 섞여서 산돼지 고기를 내 처와 함께 한구석에서 굽고 있었다. 그걸 제물로 바친다는 얘긴데... 갑자기 이넘의 Nag Hammadi 란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거라.

몇인 전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樂園(낙원: paradise)이란 곳" 중에서 Kerala란 인도의 서해안 남쪽 지방을 내 동창이 이메일로 보여주는 거라. 그곳은 신약성경의 '도마' 즉 Thomas란 예수의 제자가 AD 54년에 그곳으로 가서 포교했다는 지역이다. 기원 전부터 spice 즉 후추, 카레, 고추 등속의 음식향료의 고장으로 유명하였던 고로 당시에 유태상인들이 그곳에서 무역행위를 했던 모양이다. 그 기독교로 개종한 그들의 후예가 지금까지 그곳에 사는 바라, 2012년 통계로는 Kerala 지역인구의 19%가 기독교人이란 얘기를 했었다.

1945년에 앞에 말한 Nag Hammadi란 고장의 한 묘지에서 Gospel of Thomas로 알려진 "토마스經(경)"을 위시하여 52개의 고전뭉치가 발견되었다. 新約은 3개의 복음서인 마가, 마태, 누가를 共觀福音(공관복음)이라 부르고 네번째로 요한복음서를 곁드려서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짧은 생애를 진술하고 있다.

'마가'가 가장 먼저 쓰여졌고 다음에 '누가', 그리고 마태가 AD 90년 전후에 쓰여졌다고 알려져 있다. 요한복음은 AD 100년을 넘겨서 쓰여진 책이다. 그리고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사도바울의 서신들이 있는데 AD 49년인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의 13편의 여러 편지에서는 어디에도 예수를 실제인물로서 언급하는 내용이 없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4복음서는 실제로 산 사람의 출생에서 죽는 과정을 거친 한 선지자로서의 일대기를 시간적 흐름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Thomas經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만 일열로 나열하고 있다고 한다. 요한복음이 이런 점에서는 공통된 면이 엿보인다고...

학자들은 共觀(공관: 같이 본다)하는 과정에서 어떤 데는 있고, 어떤 복음서에는 언급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 이유를 지금은 없어진 자료로 Q라는 책이 있었지 않았나 했었는데, 일부의 학자는 Thomas經이 바로 Q의 source일 것이다고 본다. 이 글은 원래 2014년 9월 초에 쓰여젔었다. 그런데 어제 도올 김용옥 선생이 The Gospel of Thomas, 즉 '도마의 성경'에 관한 열댓편의 글을 발견하고는 내가 매우 혹하게 되어서 중요한 몇줄을 아래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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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는 원래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 이 쌍둥이를 희랍어로 표현한 것이 디두모(didymos)이다. 따라서 “디두모라 하는 도마”라는 표현은 ‘족발’이나 ‘역전앞’과도 같은 표현으로, 2개 국어의 의미를 중첩시킨 동어반복이다. 도마나 디두모나 쌍둥이임을 나타내는 일반명사일 뿐 그 이름(고유명사)은 아닌 것이다. “디두모 유다 도마”에서 그 이름은 “유다”(Judas)이다. 가롯 유다가 아닌 쌍둥이 유다가 있는가? 복음서에서 유다는 예수의 형제로서만 언급된다(마 13:55, 막 6:3).

그렇다면 이 유다는 누구의 쌍둥이일까? 많은 성서학자들이(Koester) ‘쌍둥이 유다’(Judas the Twin)는 바로 예수의 쌍둥이라고 증언한다. 시리아전통의 도마행전(11장)에는 예수의 제자 도마는 예수의 쌍둥이였다고 확언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에게 쌍둥이가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동정녀 설화의 허무개그적 측면을 나타낸다. ‘쌍둥이 도마’의 전통은 동정녀 설화와 무관한 별도의 초대교회의 한 설화양식이었고, 도마복음의 저자는 그 이름을 빌려 예수의 친근한 모습을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Q복음서의 예수는 아주 단순하게 그냥 “가난한 자”를 말했을 뿐이다. 그는 가난을 심령화하지 않았다. ‘가난한 자’란 오직 돈 없는 자, 경제적으로 곤궁한 자, 의지할 데 없이 부랑하는 자, 돈이 없어 마음까지 가난해진 자일 뿐이다. 갈릴리 지평에서의 예수의 친구들은 돈 있고 부유해서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재산 빼앗기고 농토 빼앗기고 올데갈데없이 부랑하는 홈리스들이었다. 그래서 이어오병의 설화가 말해주듯이 사오천 명씩이나 예수라는 지도자를 따라서 몇 십 리 길을 며칠씩 부랑하곤 했던 부평초 같은 민중들이었다. 예수는 바로 이들에게 천국을 선포했던 것이다. 왜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는가? 왜 부자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부자들은 돈과 재물과 소유에 집착하는 데 반하여 가난한 자들은 집착할 건덕지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Q복음서와 도마복음서를 일관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바로 ‘무소유’다. 이 무소유의 사상이야말로 원시불교의 사상인 동시에 원시기독교의 핵심사상이었다. 무소유는 바로 현세적 가치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Q복음서는 말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생각으로 눈멀지 말라. 부질없는 염려를 끊어라. 심령과 영혼을 결한 자들만이 이런 것들을 구하나니.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주어지리라(Q 53, 눅 12:29~31, 마 6:31~33).

Q복음서는 또 원시불교가 말하는 멸집(滅執)과 동일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삶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삶 자체를 잃을 것이요, 자신의 삶의 집착에서 벗어나 나를 따르는 자는 오히려 삶을 향유하리로다(Q 58, 눅 17:33, 마 10:3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훔쳐가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Q 54, 눅 12:33~34, 마 6:19~21).

이 러한 논리를 세속교회 조직은 교회에 헌금하라는 명령으로 왜곡하여 신도를 기만하는 데 사용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예수에게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현세적 가치의 부정으로서 이러한 무소유의 논리를 철저히 관철시킨 지혜로운 사회사상가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Q복음서의 예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소유와 집착에 광분한 자들의 혼탁한 잔치를 과연 이 조선땅의 기독교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묻겠노라! 이 땅의 민중을 이끌겠다고 나선 정치적 지도자라고 한다면, 더욱이 기독교인임을 자처하고 나선다면, 무소유를 실천하고 이 땅의 재물을 거부하고 저 하늘에만 보물을 쌓아둔 부끄럼 없는 인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에게 할렐루야 만세를 보내는 광란의 민중들을 과연 예수를 따르는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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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2014/9/05일 현재)에 좀더 알아하보고자 Nag Hammadi와 Thomas Gospel에 관한 지식을 Google해 보았다. 자세히 읽고 보니 '토마스經'이란 것이 내 맘에 쏙 들더군. Gnostic이라고, 희랍철학에 근거한 생각인데, 거기에 신비적인 종교적 색채를 가미한 것으로 보인다. 다~ 인용할 수는 없는지라 요건만 추출해서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물론 관심없는 분들이 많을 줄 안다. 허나, 귀있는 者는 듣고, 눈있는 者는 볼것이다. 해석해주기에는 너무 길어서 생략한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꿔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마는....

In the Thomas gospel, Jesus is presented as a spiritual guide whose words (when properly understood) bring eternal life (Saying 1). '토마스經에서는 예수를 永生(영생)을 가져다 주는 영적지도자로서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면) 부각하고 있다. (말씀 1)

Readers of these sayings are advised to continue seeking until they find what will enable them to become rulers of their own lives (Saying 2) 그의 말씀들을 읽는 자들은 (즉 讀者들은) 계속 그 뜻을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말씀 2),

and thus to know themselves and their legacy of being the children of "the living Father" (Saying 3) 나아가서 자신들이 누군가를 알게 될것이다. 결과적으로 "살아있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상속물(相續物)을 물려받는다. (말씀 3)

These goals are presented in the image of "entering the Kingdom" by the methodology of insight that goes beyond duality. (Saying 22). 그 목적하는 바가 二元(이원)적 사고, 즉 음과 양, 진실과 거짓, 천사와 악마, 뜨겁고 차고, 기쁨과 슬픔, 천당과 지옥, 등등을 뛰어넘는 直觀(직관)으로 "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상 또는 환상으로 제시받게 된다. (말씀 22)

The Gospel of Thomas shows little or no concern for orthodox religious concepts and doctrines. Scholars have traditionally understood the Gospel of Thomas as a Gnostic text because it was found amongst other gnostic texts, was understood as being prone to a Gnostic interpretation by the early Church, and emphasized knowledge as the key to salvation, particularly in Saying 1. However this view has recently come under some criticism by suggesting that while it is possible to interpret the text in a way that aligns with Gnosticism there is nothing inherently Gnostic about the text itself.
토마스 복음서는 정통의 종교적 개념과 그 원리에 거의 관심도 없고 또 상관하지도 않는다. 학자들은 오래전 부터 토마스經을 초창기의 기독교에서 靈知主義的(영지주의적), 즉 Gnostic의 한 모습으로 해석했던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리고 知識(지식)을 강조해서 그것이 구원의 열쇠인 것으로, 특히 말씀 1에서 처럼,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최근에 와서 뭐라고 비판하는고 하니, Gnosticism에 입각해서 이해할 수도 있으나 그 내용의 어디에도 Gnostic 즉 知慧(지혜) 또는 知識(지식)을 시사하는 데가 없다고.

The Gospel of Thomas emphasizes direct and unmediated experience. In Thomas saying 108, Jesus says, "Whoever drinks from my mouth will become as I am; I myself shall become that person, and the hidden things will be revealed to him." Furthermore, salvation is personal and found through spiritual (psychological) introspection. In Thomas saying 70, Jesus says, "If you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bring forth will save you. If you do not bring forth what is within you, what you do not bring forth will destroy you." As such, this form of salvation is idiosyncratic and without literal explanation unless read from a psychological perspective related to Self vs. ego. 이 복음서는 직접인(역자 참고:) 경험을 강조하고 일부러 기도하지 않는 점을 강조한다. 그 말씀 108에서, 예수가 말하기를 "누구나 내 입에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고, 나 또한 그 사람과 같이 될 것이다. 이로써 감추어진 것이 그에게 들어나리라. 나아가서 구원이란 개인적인 것으로 정신적 내지 심리적인 내적 탐구로써 이루어진다. 말씀 70에서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에 자신 안의 것을 꺼내놓지 않으면, 그 안에 남은 것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 이와 같은 바, 이런 형태의 구원은 각 개인에 국한된 것이므로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다 마는 각자의 심리적 자신(自身)과 이기적 동기에서 읽어야 만이 그 진실된 의미를 파악한다.

참고: Direct, 즉 직접이란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목사나 신부가 medium, 즉 중간자로서 끼어드는 것이 아닌 것을 말함.

In Thomas saying 3, Jesus says,... the Kingdom of God is inside of you, and it is outside of you. When you come to know yourselves, then you will become known, and you will realize that it is you who are the sons of the living Father. But if you will not know yourselves, you dwell in poverty, and it is you who are that poverty. 그 3절에서 예수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고, 그리고 너희 밖에 있다. 네가 자신을 아는 경지에 이르면 이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살아있는 아버지가 너희 자신들인 것을 깨닯게 되느니라. 그러나 너가 너 자신을 모를진데 너희는 가난에 살지며, 그 가난 그 자체가 너다. (역자의 생각은 정신적 가난을 뜻한다고 본다.)

In the other four gospels, Jesus is frequently called upon to explain the meanings of parables or the correct procedure for prayer. In Thomas saying 6, his disciples ask him, "Do you want us to fast? How should we pray? Should we give alms? What diet should we observe?" For reasons unknown, Jesus's answer is found in saying 14, wherein he advises against fasting, praying, and the giving of alms (all contrary to Christian practice of the time), although he does take a position similar to that in Mark 7: 18-19 and Matthew 15:11 that what goes into the mouth will not defile a person, but what comes out of the mouth will. 다른 4 개의 복음서들에서는 예화나 기도의 바른 방법을 자주 설명해달라는 경우를 본다. 말씀 6에서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묻기를 "당신은 우리가 식음을 걸르기를 원하는가? 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또는 10일조를 받쳐야 하는가? 무슨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등등의 것인데, 무슨 이유에서 인지 말씀 14절에서 마가복음 7장 18-19절에서 언급한 것들에 반대하는 , 특히 당시의 관행이었던 심일조에 어긋나게 충고 했고, 고마태복음 15:11절에서 말했드시 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고 했던 것과는 상이한 것을 말하고 있다.

This is just one example in Thomas in which the hearer's attention is directed away from objectified judgments of the world to knowing oneself in direct and straighforward manner, which is sometimes called being "as a child" or "a little one" through the unification of dualistic thinking and modes of objectification. (For example, Sayings 22 and 37) To portray the breaking down of the dualistic perspective Jesus uses the image of fire which consumes all. (See Sayings 10 and 82) 이런 얘기는 한가지 예에 불과한 것으로 청중의 관심을 세상적인 어떤 것들을 비판하는 데에서 직접적으로나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을 살펴서 아는, 즉 '어린이 또는 작은 아이'가 되는 데로 돌리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이원적 생각이나 특정사실에 집중하도록 하고자 한 것으로 간주된다. (예로써 말씀 22 그리고 37절)

The teaching of salvation (i.e., entering the Kingdom of Heaven) that is found in The Gospel of Thomas is neither that of "works" nor of "grace" as the dichotomy is found in the canonical gospels, but what might be called a third way, that of insight. The overriding concern of The Gospel of Thomas is to find the light within in order to be a light unto the world. (See for example, Sayings 24, 26) 그의 가르침은 (예들면 하늘 왕국에 들어가는) 성경에서 문제삼는 이원적 주장인 "행위"도 아니오 "은혜"도 아니고, 제3의 길인 直觀(직관) 또는 通察(통찰)의 道(도), 즉 길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토마스經의 핵심이라고 할 사안은 자신 안의 빛을 발견함으로 해서 세상에 그 밝음을 전하려는 것이다. (말씀 24, 26)

In contrast to the Gospel of John, where Jesus is likened to a (divine and beloved) Lord as in ruler, the Thomas gospel portrays Jesus as more the ubiquitous vehicle of spiritual inspiration and enlightenment, as in saying 77: I am the light that shines over all things. I am everything. From me all came forth, and to me all return. Split a piece of wood, and I am there. Lift a stone, and you will find me there. 예수를 성령과 축복의 主 다시 말해서 지배자로 부각하는 요한복음과는 대조적으로 토마스經은 어디에나 늘 현존하는 영적인 각성 내지 깨닮에 편승하는 것이 더 강조된다고 말씀 77에서 언급한다. 다시말해서, 나는 모든 것에 비췌이는 밝음이오 또 나는 모든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온갓 것이 나오고, 또 돌아온다. 나무를 둘로 뽀개보라. 그러면 내가 거기에 있다. 돌을 들어보라. 거기서 나를 발견할 것이다.

In many other respects, the Thomas gospel offers terse yet familiar if not identical accounts of the sayings of Jesus as seen in the synoptic gospels. 다른 여러분야에서 토마스經은 단호하면서도 거의 유사한 예수님의 말씀을 다른 4복음書를 읽어본 것 같이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 위의 영문을 Wikipedia에서 인용했음 -

몇가지 중요한 것은 이렇다. 1. 구원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는다. 2. 자기가 누군지를 알아라. 3.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 안에 있다. 4. 좋은 일(works)을 하거나, 은혜(grace)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노력으로 "하늘왕국(The Kingdom of Heaven)"의 경지를 터득한다. 5. 세상 밖에서가 아니라 자신 속에서 그 왕국을 발견하라. 6. 요한복음과 유사한 것 같으나 主 즉 통치자에 매달리기 보다는 자신의 노력을 더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logos, 즉 말씀에 근거한 이유는 Gnosticism 자체가 지혜, 즉 Sofia를 숭상하는 Gnostic에서 같이 출발했기 때문이란다. 나는 불교적인 개념, 아니면 현대 심리학의 'Self 와 Ego' 에 입각한 自己性察( 자기성찰)이 중요한 대목이라는 점이 불교적 가르침과 너무나 유사해서 이 경서에 매혹된다. 물론 Thomas經이 정통기독교 믿음에서 배척을 받지만, 오늘날의 한국기독인들이 미신적인 성령충만이니, 천국열차에 급급한 작태에서 온갓 불미한 짓을 자향하는 현실을 참고한다면 참으로 "눈을 뜨게 하는 지침서"로 간주된다.

허나, 교회라는 집단을 聖域化(성역화)함으로써 기득권자들이 몽매하고 버려진 백성을 유린하는 수단으로 이런 생각을 異端 (heresy)이라 본지는 꽤 오래된다. 근세 사상사에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佛家(불가)의 가르침에서 inspiration (각성 및 통찰)을 얻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아야 한다. 한편 기독교의 주추돌에 해당하는 三位一體(삼위일체)를 매주일 신도들이 확인하는 使徒信經(사도신경)이 AD 325년 Nicaea Decree가 발표되기 전후에 "Arius와 Athanasius 와의 피비릿내 나는 싸움"(이미 발표한 바가 있는)의 끝에 교회를 주무르는 사람들의 주장으로 낙착되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마는지... 하여간에 나는 Arius의 견해와 Thomas經의 가르침에 서서 기독교의 현재 교리가 이와같이 재구성되기를 바란다. 물론 거의 불가능한 것을 잘 알지 만서도...놀라운 것은 김용옥 선생도 같은 생각을 하시더군.

禪涅槃

2016-09-18 09:41:14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5   bibliatell [ 2017-01-16 16:31:47 ] 

더 깊히 얘기하면 머리가 복잡해 지고 쉽고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우둔함으로 해를 입는 것 같아 여기까지만. ㅎㅎ

4   bibliatell [ 2017-01-16 16:31:47 ] 

더 깊히 얘기하면 머리가 복잡해 지고 쉽고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우둔함으로 해를 입는 것 같아 여기까지만. ㅎㅎ

3   bibliatell [ 2017-01-16 16:27:28 ] 

다시 발흥한 신 플라톤주의가 이제 막 시작한 신약시대, 다시 말해 예수가 승천하고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죽자 사도행전에도 언급된 스토아 학파와 에피큐로스 학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말씀을 좀먹기 시작하고 영지주의는 용해된 상태에서 응고를 시작하더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지요. 그것이 AD140년 경부터. 사도들은 철학과 함께 교회 안에 용해되어 있는 것들을 잘 분별하여 냄으로 머리를 처들지 못했으나 사도들이 다 죽고난 후 교부와 사도적 교부시대가 되자 원래 철학에 능했던 이들이 햇갈리기 시작하며 천주교가 만들어지는데 지대한 아론적 바탕을 제공하기 시작했죠.

2   bibliatell [ 2017-01-16 16:02:43 ] 

특히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민든 사람들이 오히려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명한 철학자들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 일이지요. 도울 김용욱 같은 사람도 이러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1   bibliatell [ 2017-01-16 15:57:23 ] 

댓글을 달기에 늦은 감이 있으나, 뭔 어려운 얘기를 이토록 길게 하셨나 인내하며 읽어보니 토마스경이라는 위경을 언급하시며 영지주의라는 것을 소개하려고 하시는구려. 내용처럼 철학을 바탕으로 영적인 지식을 추구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그럴듯한 이단사상이 불교가 만들어지는데도(기원전 500년)한 몫했고 오늘날엔 여호와 증인이 만들어지는데도 한 몫했다고 봐야할 것 같오. 영지주의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영적 지식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잔재하고 있어서, 성경을 아주 어려운 책으로 둔갑시키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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