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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심한 신라인들의 후예여!
작성자 coffee

비극의 시작 당당했던 고구려인의 기개와 드넓은 영토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신라인들이 외세(당)을 끌어들여 국토가 90%가 줄고 그도
모자라 한 민족은 오랫동안 중국에 대해서 조공관계로 생명을 부지해오고
이에 반해서 몽골족은 전체 유라시아 대륙으로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지금의 중동지방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그곳에 살던 게르만족과 오스만 투루크족 과 여타 군소 민족을 닥달한 결과로 지금의 스페인 지방으로 이로 인한 갈곳 없던 게르만족과 여타 소수민족들은 유럽인들의 민족 대이동을 불러와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

징기스칸의 대를 이은 훈족의 밀어부침과 바바리안들의 서진과 살기위해서 도망하던 토착민들도 서진 서진하여 여타 민족을 유럽으로 진출하고 그의 후손들인 훈족은 영원할 것 같던 로마를 멸망시키고 여타부족은 이집트로 로마로 .... 로마도 멸망하고

여타 군소 민족을 닥달한 결과로 지금의 스페인 지방으로 이로 인해 배를 만들어서 외국으로 신대륙으로 진출하고 유럽은 산업혁명을 통해서 발전 다시돌아 인도와 중국으로 중국에 밀린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다시 중국에 복속되고 이러는 동안 한반도는 두쪽으로 갈라지고 북은 중국눈치 남은 미국눈치 또 그안에서 신라인들의 후손들은 나라를 작살내고 부족해서 미국에 대한 절대 굴종과 봉물을 바치는 길만이 , FTA 협상에서 무릎 꿇고 미제 고물 무기 수입만이 살길이다?
트럼프 잘 하고 있다꼬 ?????
다 나라를 통으로 트럼프에 바쳐부꼬 치워라 고마!
남한을 미국 자치령으로 넘기고 치와뿌라 조각조각 팔아무지 말라 안카나!
내사마 지친다 아이가.
한심한 신라인들의 후예여!

2017-10-08 22:15:21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1   rainbows79 [ 2017-10-09 00:44:28 ] 

지금 스페인에서 독립 투쟁중인 카탈루냐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징기스칸의 유라시아 정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전체 역사를 6천년 기록이 시작된 이래로의
유럽의 세계지배는 불과 3백년 미국의 세계지배는
백년이 안 되는데 이 사실은 아나?
[HistoryofCatalonia ]
요약 ​북부는 프랑스와 국경지대를 이루고, 동부는 지중해에 면해 있는 스페인의 자치 지방이다. 9세기 바르셀로나 백작령으로 시작되어, 12세기 아라곤과 연합을 이루었고, 15세기 카스티야와 다시 연합체를 형성하여 스페인 통일 제국의 부분이 되었다. 

원어명
HistoriadeCataluña, HistòriadeCatalunya

카르타고와 로마제국의 통치기(기원전 3세기~기원후 5세기)
지중해 인종인 이베리아족이 기원으로 기원전 10세기부터 페니키아인 및 그리스인에 의해 식민개척이 이루어졌고, 기원전 3세기 지중해를 장악한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았다. 카르타고 장군인 하밀카르 바르카(한니발의 아버지)는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한 식민시를 건설하고 ‘바르시노’라고 명명하였다. 바르셀로나의 기원이다. 기원전 206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로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를 카르타고에서 빼앗아 두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카탈루냐는 ‘이스파니아 시테리오르’에 속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정은 이베리아 반도를 3개의 주로 재편했는데, 카탈루냐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 지배 아래 로마법과 라틴어가 도입되는 등 그들의 문물이 흡수되었다.
사라센 제국의 침입과 프랑크 왕국의 레콩키스타(5~8세기)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6~7세기 서고트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 통치기에 있던 중, 711년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받았다. 그들이 8세기에 걸쳐 갈리시아와 바스크 지역을 제외한 반도 전체를 장악하자, 795년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에브로강 북쪽의 땅을 탈환하고, 오늘날 카탈루냐 지역을 포함해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지대인 동북지역에 ‘스페인 변경백(MarcaHispánica)’을 설치했다. 변경백(또는 변경령)은 그가 로마 교황권과 함께 이슬람의 서유럽 진입을 차단하고, 그리스도교의 수호를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카탈루냐’의 명칭은 8세기 사라센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 탈환에 공을 세운 '오트게르 카탈로(OtgerCataló)'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전설이 있다.
바르셀로나 백작령의 탄생(801~987)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프랑크 왕국은 베르가, 루시용, 베살루, 콘플렌트, 암푸리아스 등의 오늘날 스페인 동북부 지역 11 개 백작령에 변경백을 설치하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권 아래 두었다. 프랑크 왕국에 의존했던 백작령들 중에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가장 세력이 컸다. 801년 첫 군주 베라(Berà)백작을 시작으로, 귀프레1세(Guifré I, 재위878~897) 통치 시기에 주변의 영주들을 복속하고, 바르셀로나 왕가 중심의 연합을 구성해 규모를 키웠다. 10세기 동안 정치적 권위가 강화되어 프랑크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백작령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카탈루냐 시대의 개막(987~1137)
987년 보렐 2세(BorrellII, 재위947~992)는 카페 왕조의 첫 군주인 위그 카페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주성을 회복하였다. 역사학자들은 프랑크왕국이 카롤링거 왕조에서 카페 왕조로 바뀐 전환기에, 자연스레 카탈루냐가 프랑크 지배를 벗어난 것으로 해석한다. 11세기 이후 라몬 베렝게르 3세(재위1086~1131)시대에 남진 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여러 백작령을 점령하여 현재와 유사한 영토를 이루었다. 1137년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아라곤 공주와의 결혼동맹으로 아라곤 왕국과 연합했다. 12세기에 쓰인 중세 라틴 연대기 ‘리베르 마이올리키누스’에서 라몬 베렝게르 3세를 ‘카탈루냐의 영웅’으로 묘사한 것이 역사상 기록에서 ‘카탈루냐’ 명칭의 첫 등장이다.
아라곤 연합왕국 시대의 개막(1137)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는 당시 1살 배기 아라곤 왕국의 여왕 페트로닐라 1세와 결혼했다. 후계자가 없던 아라곤 왕 라미로 2세는 라몬 베렝게르 4세에게 섭정을 맡기기 위해 자신의 어린 딸과 혼인을 성사시키고, 이듬해 딸에게 왕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로써 두 나라의 연합이 형성되었으며, 23살 연상의 남편은 섭정자로서 아라곤과 카탈루냐를 함께 통치했다. 그는 1147년 유럽 십자군 운동의 일환으로 오늘날 카탈루냐 지역의 레콩키스타를 완수했다. 그의 사후 아들 알폰소 2세가 왕권을 물려받음에 따라, 아라곤왕이 바르셀로나백작을 겸직하였다. 그때부터 아라곤 왕국의 히메네스 왕조는 아라곤 연합왕국 시대에 바르셀로나 가문으로 바뀌어 1410년까지 왕위를 계승했다.
카탈루냐의 지중해 진출(13~14세기)
정복왕으로 불리는 하이메 1세(재위 1213~1276)는 이슬람 지배 지역을 탈환하여 레콩키스타를 이루고, 지중해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때 카탈루냐의 통치권이 발렌시아와 마요르카까지 확대되면서 카탈루냐인 이주 정책이 시행되었다. 지금도 이곳들의 언어에 카탈루냐어가 포함되는 이유다. 13세기 아라곤-카탈루냐 연합왕국은 마요르카, 메노르카, 이비사를 포함하는 발레아레스 제도, 오늘날 이탈리아령인 사르데냐, 나폴리, 시칠리아와 그리스의 십자군 국가인 아테네 공국, 네오파트리아 공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와 토르토사는 무역항으로서 번영했다. 카탈루냐는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한 해상무역을 통하여 다양한 문물을 접하며 발전의 계기를 이루었다.
자치정부 ‘헤네랄리타트’의 탄생(1283)
1283년 아라곤 연합왕국 체제 아래에서 카탈루냐는 ‘헤네랄리타트(Generalitat)’라는 자치정부를 조직하여 최초의 법령을 문서화했다. 이는 정복왕 하이메 1세 시기 레콩키스타 활동을 위해 당시 각계각층의 대표자들이 회합하여 의사결정을 내렸던 의회제도에서 유래되었다. 아라곤-카탈루냐 연합왕국 시기에 두 국가는 자치를 인정하며 각자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면서 존속했다. 이 조직은 이후 수 백년 간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과의 연합 시기를 거쳐 카탈루냐 역사와 함께 면면히 전승되었으나, 1714년 완전히 자치권을 상실하고 카탈루냐가 스페인 왕국에 귀속되면서 해체되었다.
아라곤-카스티야 연합왕국 시대(1469~1640)
카탈루냐 지역의 자치 문제가 대두되어 독립의 요구가 발생한 시기는, 아라곤-카탈루냐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공주가 결혼하여 스페인 통일의 길을 열면서 부터이다. 카탈루냐는 오늘날의 카탈루냐 지역, 발렌시아, 마요르카를 통치하면서, 그들만의 의회, 법률, 언어, 제도, 통화를 독자적으로 구축하였다. 하지만 하나가 된 스페인 왕국 아래에서 카스티야의 마드리드로 중심지가 이동하며 바르셀로나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오스만 제국의 부상으로 지중해 무역에 제동이 걸린 상황에서, 카스티야는 신대륙 식민지 건설이 일어나 부를 축적하며 강대해졌다. 그동안 아라곤 왕국과는 다른 문화와 전통이 유지되었으나, 카탈루냐에 부과된 과도한 세금과 자치 법령의 규제 등으로 갈등이 초래되었다.
카탈루냐의 농민 봉기(1640)
스페인 통일 왕국의 펠리페 2세는 중앙집권화 정책의 강화를 위해 균일화 조치를 강요하며 자치권을 박탈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더우기 30년 전쟁 중 프랑스가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자, 카스티야 중앙 정부는 카탈루냐에 전쟁 경비의 부담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심지어 군대 주둔과 물자 징발 등을 요구하자 결국 반란이 촉발되었다. 당시 카탈루냐 지역은 흉작과 역병 등으로 힘든 시기의 연속이었다. 1640년 6월 민병대가 농민 봉기를 일으켜 수도인 바르셀로나로 행군했다. 이러한 민중항거는 카스티야 마드리드 체제와의 갈등을 재점화시켜 과두 토착 지배층이 함께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카탈루냐 공화국 선포(1641)
1641년 ‘헤네할리타트’ 회장이었던 파우 클라리스(PauClaris)는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했다.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대공국(Archiducado)으로서의 지위였다. 이를 무산시키고자 스페인 왕실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하려고 하자, 프랑스왕 루이 13세가 바르셀로나의 루이스 1세로 선포되며 스페인과 프랑스 및 카탈루냐의 싸움이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결국 카탈루냐 측과 협의없이 프랑스 루이 14세와 스페인 펠리페 4세 간에 체결된 피레네조약(1659)으로 루시용(Roussillon), 세르다냐(Cerdanya) 등의 당시 북카탈루냐의 영토가 프랑스로 넘어가고, 이외의 카탈루냐 지역은 스페인에 귀속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절대왕정도 카탈루냐 귀족의 봉건제도 유지에는 맞지 않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카탈루냐의 독립운동(1705~1714)
1700년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앙주 공작이 펠리페 5세로 즉위했다. 주변국들을 둘러싼 스페인 왕위 계승권은 13년 간 전쟁을 불러왔다. 카탈루냐 입장에서는 기존의 카를로스 2세는 지방 자치를 인정했으나, 새롭게 즉위한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가 자치 특권을 박탈하자, 1705년부터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스페인 국왕 자리를 노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대공은 1705년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자치 체제를 존중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자신의 왕권 지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171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세습 작위를 물려받아 카를 6세가 되자, 스페인 국왕 자리를 스스로 포기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페인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카탈루냐와의 약속을 져버리고, 1714년 위트레흐트조약을 체결하여 카탈루냐를 방어하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결국 1714년 스페인 카스티야 왕실 군대와 프랑스군에 의해 바르셀로나는 함락되었다.
'누에바 플란타 칙령' 선포(1707~1716)와 '헤네랄리타트' 해체(1714)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치루며 카탈루냐 문제가 부각되자, 1707년에서 1716년에 걸쳐 신계획인 ‘누에바 플란타 칙령(NueaPlantaDecrees)’을 선포하여 마드리드 중심의 강력한 국가체제를 영도했다.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로 이루어진 아라곤 연합왕국은 자치가 보장되어 있었으나, 카탈루냐 자치정부 ‘헤네랄리타트’는 해체(1714)되고 아라곤의 왕권은 폐지(1716)되었다. 곧이어 바르셀로나 정부는 카스티야 인사들로 대체되어 그들의 언어와 관습을 강요받았다. 또한 자산이 몰수되고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으며, 인지세 추가로 재정은 어려워지고, 자유는 박탈되었다. 카탈루냐 의회는 그동안 실증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스페인의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왕실의 칙령을 인가하는 수준으로 권위가 떨어졌다.
산업 혁명의 중심지로 부상: 플로레타리아 계급 양산(18~19세기)
18세기 인구의 증가와 무역의 활성화에 따른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1755년 쿠바를 제외한 서인도 제도 교역을 시작했으며, 스페인 중앙정부가 식민지와의 자유 무역을 허가하는 1778법령을 공표하여 더욱 활기를 띠었다. 특히 18~19세기 바르셀로나의 면직공업은 ‘스페인의 맨체스터’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유럽 산업 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플로레타이아 계급이 양산되었다. 19세기 중후반부터는 금속, 기계, 화학 공업체와 금융업 등으로 산업의 다변화를 겪으며 철도, 엔진, 조선, 중장비를 제작했다. 카탈루냐에 소개된 러시아 출신 바쿠닌의 아나키즘 이데올로기는 공업 노동자인 플로레타리아와 대토지 지배층 아래의 농민 의식을 자극하여, 19세기 말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문예부흥운동 ‘레나센샤’(19세기)
한편 1830년대 카탈루냐 정체성을 구현하고 언어와 문학을 되살리기 위해, 르네상스라는 뜻의 카탈루냐어 ‘레나센샤(Renaixença)’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33년 아리바우(Aribau)가 카탈루냐어로 쓴 시《조국 LaPàtria》가 기폭제가 되었다. 19세기 중반 카탈루냐 문화 개혁으로 이어져 철학, 과학, 예술, 법률 등으로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또한 1888년 바르셀로나 종합박람회의 개최를 통해 유럽의 도시로 격상시켰다. 이는 1890년대 카탈루냐어 사용 지역의 자치를 요구하는 정치운동의 출현으로 이어졌으며, 1906년 카탈루냐 연대 운동이 일어나, 10만 대중시위가 전개되면서 민족주의 정당이 설립되었다.
카탈루냐 자치 단체 연합의 활동(1914~1925)
1914년 4개의 주 행정부로 구성한 자치 단체 연합(MancommunidaddeCataluna)이 결성되었다. 스페인 의회 하원에서 권한을 제한하여 창설을 승인했지만, 정치적인 중요도는 충분히 내포했다. 1714년 이후 처음으로 카탈루냐 연합 조직체로서 존재감을 인정받은 것이다. 의장 프랏 델 라 리바(EnricPratdelaRiba)는 카탈루냐 민족 부흥의 기반으로 삼고자 도로, 항만, 철도, 통신 등의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하고 교육, 문화, 과학 기관을 설립했다. 하지만 1925년 프리모 데 리베라 군사 독재 시절 분리주의로 비춰지며 불법으로 간주되어 해체되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스페인은 중립국가로서 교전국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전진기지로 활용되어 카탈루냐 산업은 다변화했다. 바르셀로나에 공장을 둔 이스파노-스위스 회사는 항공기 엔진을 공급하여 상당한 이익을 취했으며, 전쟁 이후 자동차를 생산하는 등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했다.
스페인 제2공화국 출범과 ‘헤네랄리타트’ 복권과 해체(1931~1939)
1931년 스페인은 왕정에 반대하고 공화정을 지지한 자유주의자들의 승리로 제2공화국을 출범했다. 바스크, 발렌시아 등과 함께 공화파를 지지한 카탈루냐는 ‘헤네랄리타트’가 복권되어 자치를 회복했다. 의장 프란섹 마시아(FrancescMacià)는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하고 헌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카스티야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어 자치법 공표 수준에 그쳤다. 1934년에는 카탈루냐 총파업을 중심으로 스페인 정부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헤네랄리타트'는 강제 해산당했다. 이후 1936년 다시 복권되었다가, 스페인 내전의 결과로 1939년 완전히 해체되어 프랑코 정권 시기에 의장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스페인 내전(1936~1939)과 프랑코 독재시대(1939~1975)
스페인 공화국과 프랑코 반란군 간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에서 카탈루냐는, 프랑코 파시스트 세력에게 자치를 인정받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공화파를 지지했다. 여기에 공화파인 인민 전선 정부의 마지막 거점이 바르셀로나여서 카탈루냐는 직접적인 피해의 대상자였다. 프랑코 군대는 1939년 1월 바르셀로나를 점령했고, 2월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 정권을 승인했다. 프랑코의 슬로건은 스페인의 통일이었다. 연방주의 또는 자치 체제는 분리주의로 간주해 용납하지 않았다. 특히 카탈루냐주의는 유럽식 모델과 연계되어 근대화 및 민주 사상이 내포되어 있어 프랑코 정권의 억압적 민족주의와 상반되었다. 공공장소에서 카탈루냐어 사용이 금지되는 등 정치, 사회, 군사 통제권까지 박탈 또는 제재를 받았다. 이후 1939년 프랑코 정권 아래 해체되었던 카탈루냐 자치주정부인 ‘헤네랄리타트’는 1977년 스페인 민주화의 도래와 함께 복원되었다.
카탈루냐 자치지방의 현황(2016)
1939년 해체 이후 ‘헤네랄리타트’의 의장들은 프랑스로 망명하여 승계가 유지되다가, 1977년 의장 조셉 타라데야스(JosepTarradellas)가 돌아와 스페인 정부에 합법적인 인가를 받아 운영하다가, 1978년 개정된 스페인 헌법에 따라 카탈루냐 자치정부로 권한이 이양되었다. 카탈루냐 지역은 스페인 국내총 생산 20%를 차지하는 부유한 지역으로, 스페인에 가장 많은 세금을 내고 있어 불만이 높다. 2008년 금융 위기 후 재정 독립을 요구했지만 실패하자 분리 독립의 열망이 커졌다. 2012년 안달루시아가 49억 유로 상당의 구제 금융을 요구하며 위기에 빠지자, 카탈루냐도 연대적 경제위기에 봉착하면서 요구가 거세졌다. 2014년 스페인 중앙정부 비승인 투표에서 80%가 분리 독립에 찬성 의견을 보였으나, 스페인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무효가 되었다.2016년 1월에 당선된 분리 독립 강경론자 카를레스 푸이그데몬(CarlesPuigdemont) 카탈루냐 주지사는 “18개월 이내에 독립하겠다”라고 천명하고, 분리 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시행하고자 하지만, 마드리드 스페인 정부는 위헌으로 반대하고 있다. 한편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스페인에서 카탈루냐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는 지역을 합쳐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지역은 카탈루냐,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카탈루냐의 역사 [History of Catalonia]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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