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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퇴사하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작성자 rainbows79

새해 첫날 출근했더니, 내 책상이 사라졌다
[퇴사 프로젝트 ①] 팀장에서 팀원으로... 좌천으로 지새운 불면의 밤

대한민국의 수많은 직장인들이 꿈꾸는 퇴사! 새해 첫날 좌천 통보를 받고, 나락으로 떨어지던, 무기력한 40대 회사원이던 제가 딴짓을 하면서 퇴사 프로젝트를 가동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과연 퇴사할 수 있을까요? -

2016년 1월. 15년째 이어오던 출근의 해가 찬란하게 떠올랐다. 16년 차 직장인의 새해 첫 출근 날은 짧은 연휴로 인해 발걸음만 더욱 무거웠다.

"여보, 이번 한 해도 수고해요. 파이팅! 우리 신랑."

아내의 진심 어린 격려는 지하철을 타고 나면 마법의 가루처럼 그 효과가 사라졌다.

'에휴. 작년 연말에 기똥찬 꿈을 꿔서 로또를 3만 원 치나 샀는데, 5천 원짜리 하나 당첨! 개꿈이었네 개꿈. 그래도 새해 첫 출근 날이고 이번 주에 인생역전을 꿈꾸는 직장인들이 로또 많이 살 테니 1등 당첨금은 올라가겠군. 훗. 나도 퇴근길에 동참해야겠군. 남 좋은 일 시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낙이라도 있어야지.'

내 책상이 없어졌다

신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여느 때보다는 의욕에 찬 힘찬 발걸음으로 3층 사무실에 들어섰는데 어째 분위기가 영. 왠지 날씨 탓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저기 김 팀장. 지금이라도 임원실 들어가 봐. 혹시 이미 말 했는데 의견이 반영 안 된 거야?"

평소 친하게 지내며 이것저것 도움을 주던 법무팀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건넸다.

"뭐야? 설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야? 아무 언질도 못 받았어? 이런 둔한 사람아. 빨리 사내 문서나 열어봐.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뭔가 사달이 났구나 싶어 불안한 마음에 사내문서를 열었더니 인사발령이 떠 있었다.

'해외영업팀 김XX 팀장 직위해제. 마케팅 지원팀 발령.'

내가 일하던 부서와 A 부서를 통합해 마케팅지원팀이란 부서를 새로 신설하고, 그곳에 내가 팀장이 아닌 팀원으로 합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뭔 호랑이 풀 뜯어 먹는 소리래? 백번 양보해서 직위를 해제하고 좌천을 시켜서, 전혀 상관도 없는 부서로 발령을 낸다 하더라도 최소한 언질은 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비록 이직을 해서 여기서는 5년 차지만 회사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살아온 시간이 15년인데.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내 우물쭈물 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는 낭패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작년 연말 송년회 때 친구 녀석 푸념처럼 떡볶이 체인점이라도 미리 준비를 했어야 하는 건가?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아! 그런데, 그럴 돈이 없지.'

나처럼 좌천을 당한 또 한 명의 팀장은 사장 면담을 요구하고 난리 법석인데 난 학습화된 두려움에 길든 것인지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속없어 보이는 부장들처럼 사장한테 아부도 못 하고 그냥 내 일만 하고 살아온 게 멍청한 짓이었구나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해 볼 뿐. 괜히 사장 면담을 요청했다 좌천이 아니라 퇴사를 명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어이없고 멍청한 생각이지만, 제도권 교육을 충실히 받고 어른의 의견은 공경하며 조직의 명령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 속에 자라온 나로서는 자신과 주변환경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회사의 처우에 조금은 화가 났다. 나이 사십이 넘은 한국 사회의 가장에게 최소한의 언질도 없이 서면으로 내려진 통보를 보고 나는 인사팀장에게 다가가 "저... 짐은 내일 옮겨야겠어요..."라고 수줍게(?) 말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고, 퇴근 후 아내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아내도 불행 중 다행이라는 뉘앙스의 격려를 해주었다.

"자기는 어디서던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지금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으니 상황을 지켜보자. 만약에라도 자기 잘리면 내가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알아볼게."

역시나 아내의 위로는 큰 도움이 되었다. 효과가 10분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렇게 불면의 밤은 시작되었다.

마흔세 살에 시작한 커피 타기

해외영업팀에서 나는 팀원 없이 혼자서 일을 하는 팀장이었다. 몇 년 전 뉴스를 보니 퇴사나 이직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사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라고 하던데. 혼자인 나는 업무적으로 크게 부딪힐 일이 없으니 사실 다른 누구보다 심리적으로는 편안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퇴사를 꿈꾸기는 했지만,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마음을 다잡고 품속에 사표 대신 로또를 품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팀원 없이 혼자서 일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 우리 회사의 업무 특성상 외국과 거래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내 업무능력은 대외홍보용으로 썩 훌륭한 수단이 되었고, 실적 면에서도 내 연봉을 뽑고도(?) 남았다. 하지만 새로운 경영진은 해외영업팀의 효용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해 나 혼자 일하던 해외영엄팀을 새로운 부서로 통폐합시켰나 보다.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새로운 부서에서 온갖 잡스러운 일을 떠맡고도 원래의 업무는 그대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익숙하지 않은 문서 작업들이었다. 버벅거리면서 어린 후배들에게 부탁을 하면 상대방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혼자 자격지심이 느껴졌다.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비록 혼자 일할지라도 해외영업팀장일 때는 '저 선배는 영어를 저리 잘하니 마흔도 안 돼 팀장 소리를 듣네'라는 시선을 받곤 했다. 하지만 팀원으로 좌천되고 나니 사람들이 나를 '저 나이 먹도록 엑셀도 제대로 못 하네.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았다.

사실 적지 않은 인원수의 이 회사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나로서는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서툰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를 않았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넘쳐 나는 상황도 아니고, 엑셀을 나보다 더 잘하는 후배들이 훨씬 많았다. 회사 차원에서도 효율성이 떨어지는 일이 아닌가?

난 유일한 장점인 영어를 활용하는 대신 엑셀에 능숙해져야 했다. 금연은 6개월 만에 중단했다. 대신 하루 1갑의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마저도 새로운 팀장이 찾는 전화에 마음 편히 머물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가야 했지만.

팩스 보내기와 복사하기, 커피 타기는 마흔세 살이란 나이에 결코 적응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힘겹게 새로운 업무에 적응해나갈 때쯤,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화상회의 연결' 때문에 취소한 괌 여행

좌천이 되기 5개월 전, 친하게 지내던 후배 녀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형 우리 부부동반 괌 여행 갑시다. 와이프가 지금 저가항공 홈페이지 접속 중인데 특가 떴어요."
"오케이. 접수. 1분 내로 부인님께 물어보고 바로 답 주마. 여행 싫어할 리가 없지."

그렇게 후배 부부와의 괌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5개월이 넘게 남았지만 주말이면 함께 만나 싸고 저렴한 숙소와 맛집을 검색하며 들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괌 여행을 2주 앞두고 새로운 부서의 팀장에게 연차 휴가를 신청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라? 여름 휴가를 당겨서 쓰는 건 좋은데, 휴가 일정 중에 월요일이 끼어 있네? 이건 안 되겠다. 알다시피 월요일은 지방 지사들과 화상 회의가 있는 날이잖아. 너 없으면 내가 화상회의를 진행하기도 애매하고, 그리고 나도 새 팀 맡고 5개월 동안 휴가 한 번도 안 갔다. 넌 그동안 꼬박꼬박 쉬었으니 회의 날짜 피해서 쉬도록 해."

화상회의 진행이란 게 아침 8시 30분에 상무 방에 와서 회의자료를 세팅하고 사람 수에 맞게 의자를 옆 사무실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노트북과 컴퓨터를 연결한 후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클릭해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연결하면 지방의 지사장들이 알아서 들어온다. 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중차대한 일인가!

"이런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5개월 전에 예약해서 환불도 안 되는 특가 비행기 표를 날려야 하는 건가요? 거기다 이미 숙소까지 다 예약을 마쳤음은 물론이요. 같이 가기로 한 후배 부부와의 약속까지? 이 일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인가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팀장에게 먹힐 것 같지 않아 울분을 삼키며 괌 여행을 취소하고 말았다.

기업은 '복제인간'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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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는 더 이상 정년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은 허울 좋은 광고 카피일뿐 회사는 오직 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2016년에 사망한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2008년 내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한국 사람들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한국의 학생들은 가까운 미래에 없어질 직업을 위해서, 전혀 필요하지 않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하루에 15시간 이상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학생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부모들을 포함한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 아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긴 부모가 되어도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니까. 세상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변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100년 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회사는 더 이상 정년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은 허울 좋은 광고 카피일뿐 회사는 오직 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 사회는 회사나 공무원이라는 조직의 안정된 틀 안에서 각 개인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청춘들이 창업을 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뛰어들려고 하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의 벽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것을 내 남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은 회사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신해철 형님의 노래 가사처럼 도시인(직장인)들은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고 매일 같이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고 상사와 후배 직원들의 눈치까지 보면서 휴가조차도 마음 편히 쓰지 못하고 있다. 신경성 변비, 두통, 설사를 겪는 사람이 일상다반사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나 기업은 조직을 벗어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공포심을 만들어 냈을까? 지금의 청춘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이라고 말한다. 학점 관리는 기본 중의 기본. 2가지의 외국어에 봉사활동에... 캠퍼스의 낭만이 시궁창에 내동댕이쳐진 지 오래다.

기업은 복제인간을 원한다. 자신의 생각과 개성을 죽이고 모든 사람이 회사 입사를 위한 스펙만 관리하게 되면, A라는 사람을 해고하기가 너무 쉽다. B도, C도, D도, 나도, 당신도 자기만의 장점을 살린 대신 회사가 원하는 학점과 외국어에만 목을 매달았으니까.

미래를 그린 영화에서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보면 기괴하게 느껴지지 않나?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로봇이 되기 위해 살아야 할까? 약간의 용기와 세상을 보는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면 로봇이 아닌 진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 그렇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위해서 회사에 다녀야 하는 게 문제이긴 하다. 나도 그렇게 지옥 같은 회사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고, 5개월이 지난 어느 날 충격적인 보너스를 받게 된다.

나는 절이 싫어도 버텨야만 하는 스님이었다.

[퇴사 프로젝트 ②] 욕지거리에 커피심부름까지, 좌천된 팀장의 처절한 현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직장인들이 꿈꾸는 퇴사! 새해 첫날 좌천 통보를 받고, 나락으로 떨어지던, 무기력한 40대 회사원이던 제가 딴짓을 하면서 퇴사 프로젝트를 가동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과연 퇴사할 수 있을까요? - 기자 말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 나는 사회와 부모님이 원하는 훌륭한 회사원이 되기 위해 온 인생을 다 바쳤다. 그리고 43살이 되던 해에 언제 쓰일지 모르는 창고 귀퉁이의 부속품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말이 있다. 회사 회의 시간에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김 팀장? 요즘 일하기 싫어? 치고 올라오는 애들 많아. 긴장 좀 타자."


그런데 스님이 교회로 갈 수 있을까? 아니면 성당으로 가야 할까?

절(회사)이 싫어도 중(나)은 떠날 곳이 없었다. 좋은 회사에 취업 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고, 취업 후에는 더 나은 회사원이 되기 위해 자기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회사원 외에는 다른 일은 생각할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사실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농구는 신장이 아니라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

2미터의 거구들이 코트를 휘젓는 NBA(미국프로농구)에서 180cm가 조금 넘는 신장으로 수 차례 득점왕을 차지한 알랜 아이버슨의 말이다. 170cm가 조금 넘는 나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은 2미터 장신들보다 훨씬 컸다.

<농구대잔치>부터 시작해서, <슬램덩크>, <마지막 승부>까지. 12살 때부터 농구에 미쳐 살았다. 운 좋게도 시골 중학교지만 전국대회에서도 성적을 내는 농구부가 있었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나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했다.

"엄마가 너만 믿고 사는 거 알지? 우리 장남, 으이구! 기특하다."
"아빠는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 기 천추의 한이라. 너는 꼭 판, 검사돼야 한데이."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 내 꿈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세계적인 석학들도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고, 기업이 이윤추구를 위해 사람들의 행복을 강탈하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요즘은 생활스포츠의 활성화로 프로 선수가 되지 못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분들을 주위에서 많이 보았다. 우리는 온 열정을 쏟아, 모든 걸 다 바쳐서 취업에 성공해도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앞으로의 세대들은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얼마 전, <마스크>로 유명한 영화배우 짐 캐리의 연설을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와 사회의 관습에 의해 하기 싫은 회계사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실패하고 좌절을 하셨어요. 어린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도 실패를 할 수 있구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봐야겠다."

너무나 멋지고 공감되는 말이지만, 사실 짐 캐리처럼 확고한 자신의 꿈을 가지기도 어렵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실천하는 일은 더 어렵다.

금연 성공의 '웃픈' 비결

좌천이 되고 나니 다양한 인간상이 내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일주일 전까지 "팀장님"이라고 부르며, 영어 해석을 부탁하던 한 인간은 '김 차장'이라고 하대를 하며 욕지거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는 나랑 업무적으로 교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직 후 첫 출근 날부터 내게 찾아와 "팀장님~ 팀장님~" 하면서 눈웃음을 치던 자였다.

두 번째 유형은 눈치가 없거나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형이다.

"어쩌면 더 잘됐네. 40대 초반에는 다른 팀장 밑에서 혼도 나고, 그늘 아래 있는 게 더 좋아."

이 인간은 2년 후 나보다 더한 인사 명령을 받고, 영업직으로 발령이 났다. 사실상의 권고 퇴직이었다. "잘됐네요. 오십을 앞두고는 이제 사무직 팀장 힘들어요. 이번 기회에 영업 제대로 배우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 참았다. 마지막 유형의 사람들 때문에 그래도 조금은 기운이 났다.

"팀장님. 기운 내세요. 내년에 복귀하실 거예요."
"고맙다. 근데 호칭부터 바꿔. 나 이제 팀장 아니야."

책상에 커피를 두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나가서 어설픈 위로보다 싱거운 농담으로 나를 달래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서 서서히 관심을 끊었고, 나는 새로운 업무에 엄청난 부담을 느끼며 자신감을 잃어갔다.

"야! 김 차장? 아직도 멀었냐? 뭔 자료 하나 만드는 데 20분이 걸려. 야, 됐어. 안 되면 다른 애들한테 가서 부탁하고 와."
"야! 커피 좀 타와라. 그리고 11시 50분에 윤 부장이랑 밥 먹기로 했는데, 12시로 바꾼다고 전화 좀 해라."

"그런 걸 왜 나한테 시켜. 그리고 당신 나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나. 나도 한 집안의 가장이라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어느새 다이얼을 누르고 있었다.

제일 참을 수 없는 건 이런 일들이 후배들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후배들 앞에서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얼굴이 홍당무로 변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증상은 악화되어 2년이 지난 최근 한의원 치료를 받고 있다.

유머감각이 넘치고 사람들 만나기 좋아하던 내가 어느새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3층 가운데 사무실, 팀장 자리에서 오른쪽 맨 끝 방으로 쫓겨났다. 그런데 화장실이 3층 맨 왼쪽에 위치 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마주치기 무서워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지하 2층 화장실로 다니기 시작했다.

뭐든지 나쁜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금연에 성공했다. 담배 피우는 장소에는 회사 사람들이 득실거린다. 그래서 회사에서만큼은 강제금연을 하게 되었다. 퇴근 후 아파트 근처에서 줄 담배를 피우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담배 냄새에 찌든 내 옷을 말없이 받아 주었다. 담배 냄새를 너무나 싫어하는 그녀는 나의 유일한 탈출구를 묵인해 주었다.

마트 한가운데서 펑펑 울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아내도 그중에 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아내가 내 기분을 풀기 위해 농담을 던지면,

"지금 농담할 기분이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농담이 나와? 내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티고 왔는지 알아?"

다음 날 아내가 내 눈치를 보며 차분한 분위기로 말하면,

"무슨 초상 났냐? 하루하루 전쟁이야 나는 요즘. 그런데 집 분위기가 왜 이리 영국 날씨 같냐. 짜증 난다. 진짜."

걱정이 돼 시골에서 전화를 건 어머니에게도 날을 잔뜩 세운 고슴도치처럼 굴었다.

"남들도 다 그래 산데이. 회사가 최고라고만. 꾹 참고 잘 다녀야 된데이."
"엄마가 뭘 안다고 그래요? 내가 얼마나 힘들게 회사에 다니는데, 엄마는 회사 한 번 안 다녀 봐 놓고 멀 안다고 그래요!"

제2의 사춘기라고 이해해 달라기에는 너무나 편협한 사고와 이해력으로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지하 화장실을 찾아가듯이, 나의 자존감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정신을 차리고 아내와 엄마에게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졌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 참아야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에게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다니.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마음을 가다듬자.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병 들어가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주말이면 영화에 등산에 각종 문화행사를 찾아 다니던 나는 너무나 수동적인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찾아온 불면증 때문인지 토요일은 늦잠을 자고도 소파에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여보. 우리 어디 멀리 가지 말고 가까운 마트에서 브런치 먹자. 피자 먹으면 브런치지 뭐. 가격도 싸고 맛도 좋고 얼마나 좋아. 그리고 호수공원 산책도 다녀오고..."

내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도 나를 걱정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마트로 향했다.

일요일 오전 11시도 안 된 시간인데 다음 날 출근 생각을 하니 편두통이 몰려왔지만,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집을 나섰다. 4월의 눈 부신 햇살도 남의 일 같았다. 그런데, 마트 도착 5분 전부터 갑자기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무슨 설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자리에 가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게 뭐지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매장 회전문을 여는 찰나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키가 내 허리에도 오지 않는 꼬마 아이가 뛰어나오다 나를 스치며 지나갔다. 넘어진 쪽은 5살 꼬마 아이가 아니고 나였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매장 한 가운데 주저앉았고,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어떤 강한 힘이 내 목을 옥죄고 있는 느낌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숨을 쉬게 되면서 울음이 터진 것이다. 멈출 수가 없었다. 내 자유의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울었다. 마트 한 가운데서 43살의 아저씨가... 일요일 오전 11시에. 1층 매장으로 4월의 햇살은 여전히 눈부시게 - 당황해서 같이 울고 있는 - 아내를 비추고 있었다.

그랬다. '연예인병'인 줄 알았던 공황장애가 나에게 찾아왔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직장인들이 꿈꾸는 퇴사! 새해 첫날 좌천 통보를 받고, 나락으로 떨어지던, 무기력한 40대 회사원이던 제가 딴짓을 하면서 퇴사 프로젝트를 가동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과연 퇴사할 수 있을까요? - 기자 말



대형마트 한가운데서 울었다. 공황장애 때문에 갑자기 숨이 막혀서 죽는 줄 알았는데, 다시 호흡이 되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이 와중에도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하! 돈 한 푼 없는데, 병까지 생기면 어쩌냐? 참! 내일 회의하는 월요일인데...'

이런 상황에서도 회사 걱정을 하는 나는 천생 회사원 체질인 건가. 어김없이 출근한 어느 날 오전 11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내가 김밥을 좀 말아봤지~ 우리 날씨 좋으니까 야외에서 점심 같이 먹자. 식후 커피는 자기가 사~, 시간 맞춰 회사 앞에 도착할게."

회사 앞 지하철역으로 나가니 횡단보도 건너편에 아내가 보였다. 그런데 평소 활발한 모습과 달리 울먹이는 것처럼 보였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뛰어서 그녀에게 달려갔다. 예상대로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여보. 힘들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만둬. 그깟 회사가 뭐라고..."

아내는 회사 앞으로 오는 중에 가장인 한 남성의 자살 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그분은 마지막 결정을 하기 전에 시골에 계산 어머님께 전화를 했다고 한다.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들에게는 주위의 기대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 여보, 고마워. 사람이 먼저 살아야지. 그런데, 방법이 없다. 방법이. 죽을 것처럼 힘든데, 월급 끊어지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으니... 말만이라도 고맙다.'

그때 나의 눈에 아내의 도시락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유레카!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KBS <한국인의 밥상>과 SBS <생활의 달인>의 애청자다. 본방 사수를 못할 경우 반드시 다시 보기로 시청할 정도다. 두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힐링도 되지만, 요식업을 준비하는 분들에게는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거라는 생각을 막연히 한 적 있다.

'그래! 나도 식당을 해보자. 작지만 좋은 재료로 정성스러운 음식을 손님에게 대접하고, 손님들과 친구처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

왜 나는 백종원이 될 수 없나

나는 '먹방' 이나 셰프 전성시대가 열리기 훨씬 전인 2007년경에 요리 공부를 위한 유학을 생각해 볼 정도로 음식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와 현실적인 문제로 포기했다.

일단 나만의 요리법을 개발해 보고 최후에는 처제에게 김밥을 배워보자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이 든든해지면서 한편으로는 급해졌다(처제는 성남에서 기가 막히게 맛있는 김밥집을 운영 중이다). 나도 백종원처럼 요식업으로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날 저녁부터 <한국인의 밥상>과 <생활의 달인>을 다시 보며 메뉴 선정에 들어갔다. 아내는 내가 의욕을 찾은 듯하니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지켜봐 주었다. 약 3주간 형사들이 범인을 잡기 위해 CCTV를 밤새워 보는 것처럼, 두 프로그램을 메모하면서 보았다. 그리고 두 가지 2가지 메뉴를 최종 선정했다.

첫 번째 메뉴는 경북 김천을 평정하고 있다는 '손가락 김밥'이었다. 당도가 높은 포도와 양파를 넣고 간장에 졸인다. 오이 속은 파내고, 하루 동안 냉장 보관해 아삭한 식감을 만든다. 이 두 가지가 핵심 포인트였다. 그중 절대 비법은 바로 간장이었다. 퇴근 후는 물론이고 주말마다 간장을 졸이고 또 졸였다. 설탕과 올리고당으로 낸 인위적인 단맛이 아닌, 자연이 준 포도와 양파로만 단맛을 내는 특제 간장을 만들기 위해서! 그 사이 아내의 속도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여보. <생활의 달인>에 나올 정도의 맛을 내는 특제 간장이 몇 달 만에 쉽게 만들어지겠어? 집안이 온통 간장 냄새야. 벽지가 까맣게 변하고 있다고, 이 인간아!"

두 번째 메뉴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발견한 비장의 카드였다. 평소 자연주의적인 음식을 추구하는 나의 이념과도 맞아떨어지는 음식이었다. 먼저 작은 옹기에 잎 마늘을 깐다. 우리가 고기 구워 먹을 때 흔히 먹는 알 마늘이 아닌 잎 마늘이다. 그리고 삼겹살이건 목살이건 돼지고기를 성인남자의 엄지손가락 크기로 자른 후, 묵은지로 감싸준다. 묵은지 옷을 입은 돼지고기를 잎 마늘 위에 올린 후, 물이 담긴 큰 냄비에 옹기를 넣고 중탕으로 끓인다.

집에서 주말에 시식을 해봤는데, 아내가 엄지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이내 그 엄지를 꺾어 내렸다.

"여보. 자기가 요리에 관심 많은 거 알아. 주말마다 해주는 음식도 맛있어. 그런데, 자취 요리의 연장선일 뿐이야."

"나 진짜 자신 있어! 자신 있다고! 왜 시작도 하기 전에 초를 쳐!"

그렇게 주말의 평화는 또다시 날아갔다. 스스로도 식당은 무리라는 생각을 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 업무 외에 돈을 벌 방법이 지금 현재로서는 전무하다는 사실을. 어쩌면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영어를 잘하게 된 이유

지금이라도 새로운 걸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좋을까? 중국어? 오! 노(No)!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영어 하나 하는데도 온 열정을 다 바치고, 몇 년 동안 탈진했던 기억이 스물스물 되살아났다.

1998년 5월. 복학 후 처음 치른 토익 점수를 받아보고 충격에 빠졌다.

"이게 뭐야? 무슨 토익 점수가 신발 사이즈랑 똑같냐."

200명이 모인 가운데 열악한 음향 시설로 치른 모의 토익이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졸업하기까지 2년, 중소기업 취업 후 1년 동안 영어에 매달렸다. 잠을 줄여 가며 학원에 다니고 공부를 했다. 그래도 겨우 700점이었다. 외국인 앞에 가면 입이 안 떨어지는 것 또한 변하지 않았다. 월급 130만 원으로 학원비 내고, 방세 내고, 1년에 800만 원을 모았다. 친구들과의 술자리, 연인과의 데이트 따위는 모르고 살았다.

영어와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는 마음으로 캐나다로 떠났다. 고3처럼 공부했다. 한 잔에 800원 하던 커피도 몇 번을 고심한 후에 마셨다. 그 돈을 아껴서 더 많은 수업을 듣고 싶었다. 부모님 지원으로 간 어학연수였다면 이렇게까지 공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어를 잘 하게 된 동생에게 집요하게 묻고 또 물었다. 그 녀석의 추천으로 톰 크루즈의 <제리 맥과이어>와 줄리아 로버츠의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 비디오테이프를 샀다. 캐나다에서 산 거니 자막이 없다. 저녁 식사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100일간 4시간 넘게 두 개의 영화를 보았다. 지금도 수많은 인파 속에서 톰크루즈와 줄리아 로버츠의 목소리만은 식별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3개월이 지나니 비디오를 틀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고, 귀에서 정말로 눈물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 있는데, 거실에 켜놓은 CNN 뉴스가 한국말로 자동 번역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한국에 돌아온 첫 토익에서 듣기평가는 만점을 받았다.

그렇게 처절하게 익힌 영어로 - 중소기업이지만 - 취업도 했고, 나름 안정된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취업할 때 영어로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건 내가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번역기가 나 같은 사람의 위치를 대신할 것이다. 나도 요즘 번역기 돌린다. 몇 년 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중국어라고 다르겠는가? 취미로 외국어를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직장을 다니면서 자기개발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외국어가 늘지도 않는다. 그 시간에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손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 훨씬 나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어도 중고차도 안 된다면...

요리도 중국어도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면 뭐가 있을까? 전화기 주소록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살펴봤다. 그리고 내가 아는 동년배 중에 현금이 제일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 '양 사장'을 찾아갔다.

"성님 오셨어라? 앉으세요. 난 우리 성님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지. 일단 앉아 보세요. 결정은 성님이 하시는 거니까."

"어... 근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에이. 성님! 난 사실 진작부터 성님한테 이 중고차 딜러 일 추천하고 싶었다니까. 그리고, 저기 보이시죠? 요즘 외국인들도 중고차 사러 엄청 와요. 성님은 이게 되잖아요. 쏼라쏼라!"

▲ 돌아보면 이때의 나는 '회사만 당장 그만둘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막상 회사를 관두려고 하니 두려움이 더 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신감이 더 떨어진 상태였다. 맨날 책상에 앉아 있다가 사람들 대하는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활발한 성격이랑 영업 잘하는 거랑은 완전히 다르다던데... 이것도 기본 자금이 있어야 하는구나. 여기도 돈. 저기도 돈이 필요하구나.

그 이후로, 재기발랄한(?) 성격을 살려 노래강사에 도전해 보려고 관련 학원에 전화를 몇 번 해보기도 했다. KBS 'VJ특공대'에서 노래 강사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시작한 내 나이 또래의 여자분이 나온 것을 본 결과였다.

돌아보면 이때의 나는 '회사만 당장 그만둘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막상 회사를 관두려고 하니 두려움이 더 컸다. 이게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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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야기 공황장애.

공황장애 실제 겪어보니... '연예인 병' 아닙니다

'좀 쉬라'는 몸의 신호 무시했다가... 아찔했던 지난 여름

"아~ 피곤해. 하루만 종일 잤으면 원이 없겠다…."

이런 푸념 한 번쯤 안 해본 사람 없을 것이다. 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면 이런 푸념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직장이 60대까지 정년을 보장해 주지도 못 할 뿐더러, 제2의 삶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편안하게 연금 받으며 사는 삶이 아닌, 또 다른 치열한 삶을 말이다.

나 역시 이런 저런 고민과 불투명한 미래의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 둘째를 낳고 맞벌이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다.
집 문제, 아이의 교육문제, 건강문제, 부모님의 거취와 건강 등등 모든 것들이 고민이다. 그러다보니 정작 내 몸에 대한 걱정은 언제부터인가 등한시 되어왔다.

공황장애가 '연예인 병'? 직접 겪어보니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뉴스에서 연예인들이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쓰러졌다는 소리,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는 소리 등을 흔히 듣는다.
그래서 공황장애를 우스갯소리로 '연예인 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공황장애가 뭔지, 도대체 왜 그런 병에 걸리는지, 병을 앓으면 어떤 증상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연예인만 스트레스와 힘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닐 터, 일반인들 역시 무수히 많은 고초를 겪으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조금이라도 쉬었다 가면 될 것을... 그게 어디 맘처럼 쉽게 되겠는가.

첫째 아이가 올해로 5살이다. 매일 야근에 주말이면 마음 놓고 쉬지도 못하지만 평일에 퇴근하면 최대한 놀아주려고 했다.
주말이면 공원이나 동물원 등 자주는 못 가지만 최대한 놀아주려고 노력했다. 지난여름에 캠핑도 갔고,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에 힘든 줄 모르고 다녔다. 그러다 일이 터지고 말았다.

2014년 여름 어느 날, 평소처럼 출근을 해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아이의 몸에서 열이 나며 이상증세가 있는 것 같다는 원장의 말이었다. 그곳에서 원생들과 함께 지낼 수 없다며, 귀가 조치를 취해 주었으면 하는 말이었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와 연락이 닿지를 않았고, 어머니조차 집에 계시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부랴부랴 일을 정리하고 집으로 출발했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편의점에서 빵을 사서 차 안에서 먹으며 갔다. 그런데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땀이 가시질 않았다.
급기야 시야가 좁아지면서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안 된다.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교통사고는 물론 내 몸이 어찌 될지 모른다.'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정신이 혼미하고 시야는 극도로 좁아졌으며 식은땀은 계속 흘렀다. 있는 힘껏 운전대를 꽉 부여잡고 있으니 잠시 뒤 평정심을 되찾고 조금 나아졌다.

불과 5분이 채 안 되었던 시간이지만 단순히 체한 것만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뒤 '수족구'라는 아이의 병명을 알았고,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내 예상대로 체한 것만이 아니었다. 토요일 저녁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대로 쓰러져서 1분 정도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 졌다. 만삭의 아내는 무척이나 걱정을 했지만 괜찮다고 안심을 시켰다.

일요일인 다음날 오후, 어머니는 닭백숙을 사 주시겠다며 함께 가자고 하셨고,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함께 집 앞 식당에 갔다.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는데 또 의식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식당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의식을 되찾은 난 땀에 범벅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내와 택시를 타고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 내 머리는 수많은 생각에 휩싸였다. 한 달 뒤면 태어날 둘째, 우리 가족이 있는데 혹 큰 병은 아닐까. 걱정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해서 몇 가지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피검사, 소변검사, 뇌 CT, 심장초음파, 가슴 CT 등을 했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소견을 듣게 되었다.

모든 검사는 정상이었으며, 쓰러진 이유는 저혈압성 실신(미주신경 실신)일 것 같다는 소견이었다. 그러므로 원인을 찾기 위해 며칠 입원해서 다른 검사를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3일 정도를 입원해서 심장 초음파 정밀검사 그리고 24시간 심장체크기기를 달았다. 걱정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퇴원을 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원 당시에는 별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은 원인을 찾지 못 한 채 퇴원을 해서 집으로 왔다.

그런데 집에 와서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있는데 느닷없이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이러다가는 곧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누워있는데도 쉽게 진정이 되지를 않았다. 약 10분 정도를 그렇게 있으니 심장은 잦아들었지만 내 몸은 정상이 아니란 것을 직감하게 됐다.

힘이 되어준 가족... 몸이 신호를 보낼 때는 쉬자

다음날 간신히 출근을 했다.
마침 여름휴가를 앞두고 있었기에 집에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루 종일 헛구역질이 났고 식욕이 전혀 없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팔과 다리에 전혀 힘이 없었다.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퇴원을 한 것이 내심 걱정이었다.

만삭의 아내는 퇴근 후 첫째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갔고 아내와 아이의 목소리가 저 멀리 울리기만 했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있는 내 신세가 정말 싫었다. 누구보다 건강하다고 믿었던 나였기에 그 실망감은 더욱 컸다.

그즈음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형 혹시 모르니까 신경과를 한번 가보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신경과? 전혀 생각지도 못 했다.
동생은 다음날 예약을 잡아주었다. 있는 힘을 다해 외출 준비를 하고 전철을 타고 가는 데 불과 한 정거장만 가면 되는 거리를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간신히 도착을 해서 숨을 헐떡거리며 의사를 마주했다. 그리고 의사가 내린 처방은 '공황장애, 불안장애'였다.

'공황장애' 영어로는 '패닉 디솔더(Panic Disorder)'이다.
예를 들어 심장이 뛰는 것을 우리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
스스로 뛰는 것이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되는 것 역시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 이러한 작용들은 우리 몸의 신경들이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뇌와 연결이 되고 모든 장기와 연결되어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이 명령이 잘못 전달되면, 뛰지 않았는데도 심장 박동이 빠르다. 하루를 굶어도 식욕은 없다. 흥분을 하면 흥분이 진정되지를 않는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상호작용이 불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다양한 고통을 호소한다.
소화가 안 되는 사람, 두통이 심한 사람, 어지럼을 느끼는 사람 등등 어디 한 곳이 꾸준히 아픈 것이 아니다. 온 몸을 돌아다니는 고통을 호소한다. 공황장애가 시작된 이유 역시 다양하다.

건축회사에 다니는 내 동생 역시 이 병을 앓고 있다. 장기출장으로 사막에 가 있다가 40도가 넘는 곳과 에어컨이 있는 사무실을 오갔으며, 허겁지겁 음식을 섭취하다 이 병에 걸렸다.

'연예인 병'이라고 농담으로도 건넬 말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말을 못 할 뿐이다. 약에 의지해서 엉켜있는 내 몸의 신경을 안정시키는 데는 적게는 1년이 걸리고 많게는 2~3년은 기본이다.

내 몸은 신호를 주었을 것이다. '좀 쉬었다 가라'고 말이다. 그런데 가볍게 무시한 난 지난해 무너지고 말았다.
가족에게 걱정을 주었고 나 자신에게 실망을 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다행히 지금은 약에 의존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항상 주의 하고 있다.

가족이 있어서 힘이 됐다. 새 생명이 나에게 힘을 주었다.
연로하신 어머니의 걱정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힘을 주었고 안심을 시켜 주었다. 그래서 가족인가 보다.

부디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우리 사회에는 말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없는지 주위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오마이뉴스>

2018-08-09 13:55:25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deborah9 [ 2018-08-09 16:0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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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eborah9 [ 2018-08-09 15:5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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